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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번의 세계가 끝날 무렵
캐트리오나 실비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6월
평점 :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선생님과 제자, 직장 동료 등
살면서 마주하는 나 이외의 존재인
다른 사람 즉 타인에 대해서
완벽한 이해를 하기란 어렵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에
내가 아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는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때로는 이토록 깊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알다가도 모르겠다' '도대체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이번에 읽게된 《백만 번의 세계가 끝날 무렵》은
그 이해에 대한 폭을 넓혀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데뷔작임에도 현재 15개국에서 출판권이 계약되었고,
아틀라스 엔터테인먼트와 유명 배우 갤 가돗이 참여한
프로덕션 파일럿 웨이브에서 영화 판권을 계약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지구상 인간에게 가능한
거의 모든 형태의 사랑을
수많은 생애에서 거듭하게 되는
남녀의 운명과 그 비밀을 다룬 소설로
'소라'와 '산티'라는 두 주인공의
무한한 생애와 관계를 바탕으로 풀어나간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는 영국에서 성장하면서,
남들과 다른 이상한 억양과 평야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산티에게는 이런 작가가
겪었던 어떤 차별이라는 감정이 심어져 있기도 했는데,
소프트웨어 회사의 솔루션 개발자로 일하며
틈틈이 SF 소설을 집필한 그녀는
자신의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이번 작품에서도
SF와 로맨스, 서스펜스를 오가며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서사와
대담한 스케일을 한정된 장소에서 풀어가는
자신만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은 크게 3장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어지러이 펼쳐지며 다양한 관계로 엮이는
소라와 산티의 여러 세계가 펼쳐지며
그들이 이런저런 관계로 만나고
또 새로운 세상에서 얽히고 헤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소설의 막바지에서
보게 될 결말에 다다르는 단서들을 보여주는 1장,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무한대로 주어지는 생애를 알게 된
소라와 산티가 그곳을 벗어나려는 시도와 함께
서로를 찾고, 피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2장,
이 반복되는 생애 속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가며 마지막에 다다르는 3장으로
점점 그리고 짙어져가는 소설의 농도는
처음에는 정신없이 쫓아가다가 마지막에는
그 농밀함에 읽는 속도를 늦추게 되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흔히 불교에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이
한 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인연이 후생에도 이어진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처음에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스쳐지나는 옅은 인연 같았던 소라와 산티가
여러 생애를 다시 살아가면서
계속 얽히고 연결되며 관계를 맺는 모습이
동양적 불교 관점에서는
애초에 하나의 이야기가 다양한 인연으로 풀어지는
자연스러움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공간적 한계와
여러 번 반복해서 살 때마다 상수처럼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까지,
모든 것이 운명 같고 신의 뜻이라 생각하는 산티와
그저 지금 살고 있는 삶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소라의 모습이 대조되며
그들의 색이 더욱 진해져가는 모습은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이기도 했다.
타인에 대해 나만큼이나
완전한 이해를 하기란 어렵다.
여러 번의 생애를 반복하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소라와 산티가
마지막에 다다르며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 도전과 고민을 함께하며 여러 번의
생이를 살아낸 것만 같은 피로함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타인에 대한 이해로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성장과 변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만약 소설 속 그들과 같은
무한한 생애를 반복하고 있다면
소라와 산티 중 누구와 같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끊임없이 충돌하고 마찰했던 두 사람의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다를 수 있었던 결론까지
꽉 차게 즐길 수 있었던 새로운 느낌의 소설이었다.
"이 글은 문학수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