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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번째 우주
김아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4년 6월
평점 :

같은 모습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수없이 많은 우주,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평행선상에 있는 다른 세계.
평행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평행우주에 대해서 얘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평행우주의 세계를 믿으세요?"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 평행우주라는 것 자체가 '내가 인식하는 순간'
존재하게 된다면 얘기는 달라지게 된다.
평행우주는커녕,
하루를 살아내기에 바쁜 열아홉 살 박연우.
어린 나이에 연우를 낳아 키우다가
연우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혼한 부모님,
그 뒤로 아빠와 단둘이 살아온 연우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을 믿을 수가 없다.
일하던 마트에서 해고를 당하고
건설 현장에서는 생초보나 마찬가지인,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빠가 건설 현장에서
그것도 십오층에서 외벽 작업을 하다가
추락 사고를 당했다는 것.
엄마도 없이 살아온 연우에게 아빠도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지독한 외로움을
더욱 키워가는데,
연우는 아빠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
그리고 아버지가 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된
원인을 자신이 제공한 것만 같아서
후회와 원망 속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연우 앞에 상조회사에서 나왔다는
'엔딩플래너' 박태영과 권마래는
장례 절차 논의 및 평행우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다른 평행우주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생전생애 체험'에 대해서 알려준다.
믿기 힘든 설명 앞에 다른 것보다도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다'라는 이유 하나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그리운 만남을 원하는 연우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계약 체결 이후 퀀텀폰을 이용해
평행우주로의 이동과 엔딩플래너와의 연락을
주고받게 된 연우는 아빠가 살아있는 평행우주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제13회 마해송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 김아영의 장편소설 《512번째 우주》 다.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한 작가는
이과 출신답게 '평행우주'라는
낯선 개념을 바탕으로 SF 소설을 써나갔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 이외에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가진
평행선에 있는 무한한 우주가 있고,
그 평행우주는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존재하게 된다'라는 가정으로
주인공인 연우가 엔딩플래너와의 계약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평행우주로의 체험을 하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며 한 번씩 기억이 잊히거나 왜곡되며
'내가 진자 그런 말을 했다고?',
'여기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소설 속에서는 이런 상황을 평행우주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
왔다간 것일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내 평행우주는
그저 가능한 상태로만 존재하다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그 세계를 떠올리는 순간 다른 평행우주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며,
인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미를 부여하고 인식하는 순간 존재하게 된다는 것,
평행우주에 대해서 크게 인지하지 못했던
나 역시 가지게 된 생각이다.
어떤 기시감에 대한 의문이나
평행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떠난 가족 등 보고 싶은 사람,
후회되는 어떤 사건을 되돌리고 싶은 사람 등
나의 선택으로 인해 나뉘게 된
평행우주의 무수한 뿌리 앞에서
다른 평행우주로의 이동을 원하는 이들에게
'엔딩플래너'가 제시하는 생전생애 체험은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우의 삼촌임을 드러내지 않은
엔딩플래너 박태영이 숨진 비밀,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있는 평행우주를 찾다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엄마와 함께 하는 삶'의
평행우주로 가게 된 연우,
다시 마주한 '살아있는 아버지가 있는 우주'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까지!
연우는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평행우주 앞에서
각기 다른 삶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과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결국 내가 마주해야 할 '현실'을 깨달으며
진짜 '나'를 알게 되고, 성장을 하게 된다.
생전생애 체험을 넘어 엔딩플래너로
활동하게 된 연우의 모습과
타인의 평행우주까지 들어가게 된 모습은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말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았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이 만들어낸
무한한 수의 평행우주.
평행우주의 존재 자체뿐 아니라,
인생의 선택이라는 과제 앞에서
내가 만들어낸 수많은 가능성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 큰 빅뱅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평행우주를 오가며 연우가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결심들은 오늘날의 연우를 한 뼘 더 성장시킨다.
상상만 했던 다른 선택의 결과가 나를 어떻게 바꿀지
궁금하고 미련이 남았던 이들에게
'오늘의 선택'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서
얘기해 주는 소설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가능성 역시
인식하는 순간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막연한 선택으로 나뉘는 세계가 아닌
가능성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 너무나도 의미 있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중심으로 지금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성장과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연우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향한 진한 응원도 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자이언트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 입니다."
"인식이 존재를 결정합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나의 평행우주는 그저 가능한 상태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살아 계신 우주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데요. 연우 님이 아버지가 살아 계신 우주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두 세계는 나뉘고 연우 님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 우주로 진입할 수 있게 됩니다."
연우는 그런 복잡한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만 만나면 된다. 아니, 아버지가 살아 있는 곳으로 갈 수만 있으면 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고소공포증이 심한 사람이 어떻게 건물 십오층에서 외벽 작업을 한 건지 아버지에게 물어봐야 했다.
도대체 이 엔딩플래너는 얼마나 울었던 걸까.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엔딩플래너도 참 극한 직업 같다. 자기 가족도 아닌데 장례식 때마다 저렇게 울어대면 얼마나 괴로울까. 직업의식이 대단해 보이지만 감정소모도 엄청날 것이다. 자신은 절대 엔딩플래너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연우는 말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요. 생전생애 체험을 통해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우주로 가보고 싶어하죠. 혹은 자신의 선택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려고 일부러 불행한 우주로 가보기도 해요. 그렇지만 곧 알게 돼요. 다른 선택을 했다 한들 그 이후의 삶도 내가 기대한 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갈, 결국 그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마래는 운명이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연우에게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태영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태영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은 지울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내린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어 두렵기도 했다.
감정이 북받치는 듯 영혜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차만 홀짝거렸다. "제가 하지 않았던 선택의 결과를 확인해본들 뭐가 달라지겠어요. 인제 와서 저렇게 살면 좋았겠다는 후회만 남겠죠."
생전생애 체험은 의식이 다른 우주로 원격 전송되는 경험이다. 의식이 안정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회원이 전송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강제로 전송되면 의식이 원래 몸으로 온전히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마래는 가능한 한 지수가 스스로 돌아가려고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계약된 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지수는 이 우주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이야기를 믿어주시면 좋겠지만 믿기 어려우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굳이 구름이 평행우주에 따라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건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고 싶어서예요. 제가 사는 세계의 지은 님이 미처 전하지 못한, 구름이가 다 보고 들었지만 알리지 못한 사실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싶었어요."
연우는 자신이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자신의 평행우주가 512개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다른 사람들은 날 때부터 여러 개의 우주를 갖고 태어나 수없이 많은 우주를 만들어가는데, 연우는 단 하나의 우주에서 시작해 열아홉 살에 간신히 500개를 넘겼다.
태영은 연우에게 이 모든 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사리 결장할 수 없었다. 말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평행우주는 나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우주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하지만 무심코 내뱉은 말과 선택이라도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때로 말 한마디와 선택 하나가 돌고 돌아 삶을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연우야, 사람이 일평생 만들어낼 수 있는 평행우주는 절대 무한하지 않아. 평행우주가 생성될 때마다 상당히 많은 양의 에너지가 소모되거든.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
연우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의 평행우주가 마래와 클라이밍을 하러간 우주와 현지를 만나러 간 우주로 나뉘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엔딩플래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연우의 우주는 더이상 512개가 아니었고 지금도 맹렬하게 나뉘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전생애 체험을 통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 만나고자 했던 사람을 만나길 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꿈꿔온 백일몽과 달랐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보며 절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신이 현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결국 한 사람의 운명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이 다층적으로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걸 선택이라고 여기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다행이라 여겼다. 그 선택의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외면했던 선택이 돌고 돌아 연우에게 묻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래?
연우는 엔딩플래너가 된 걸 후회하진 않았다. 그 덕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양한 평행우주를 경험하며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제 운명은 스스로 결정할게요." 평행우주는 사람마다 다르게 진화하다 언젠가 제각각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연우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와 작은 결정 하나가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리라 다짐하며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고 손을 잡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 그리워서라는 걸.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서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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