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가난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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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역사는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다.
이 책은 가난의 종식을 역사로 만드는 데 참여하라는 담대한 초대다." (12쪽)
"허다한 사람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반면, 극소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부를 독점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결코 안정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이가 넉넉히 가지고 어느 누구도 너무 많이 갖지 않는 세상을 바라셨던 하나님의 꿈에서 멀어져 버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적 불의'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바로잡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고 세상 안에 있는 부서진 것을 모두 구속하고 계신다." (14-15쪽)
"개인 구원과 사회 변혁은 나란히 간다. 그 둘은 가위의 두 날 같아서 하나로 결합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또는 노 젓는 배의 두 노와 같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개인의 하나님이시자 사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죄로 가득한 개인들을 구원하고 계시지만, 동시에 죄가 넘치는 세상을 구속하고 계신다. 복음은 영혼 구원뿐 아니라 사회 체계와 관련된다." (17쪽)
-> 월터 브루그만의 유작이 나왔다고 해서 인상깊게 봤던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문을 읽으면서 그가 어떠한 사람으로 살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가 주창한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삶으로 학문으로 예언자적 외침을 다하며 교회의 메타노이아를 요구했고, 개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는 전복적 질서의 변혁이라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에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그는 교회를 무너뜨리려하기보다 도리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서가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가난 종식을 위해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개인구원과 사회변혁이 동전과 같이 하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의 복음이 편협해지고 납작해진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말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1. 교회를 향한 사랑 - 사랑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가난과 불평등을 향한 브루그만의 분노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피부색과 지위, 정체성에 상관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생각하며 품은 것이었다. ... 브루그만이 소외된 이들을 품어 안을 때, 교회의 진보주의자들이 그를 품어 안았다." (24-25쪽)
"브루그만은 성서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영원히 사랑하고 찾으시는 성서의 하나님에 기초하지 않은 채, 사회 정의를 추구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을 옹호하는 데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고 내게 자주 말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정의에 바친 브루그만의 헌신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브루그만은 아버지를 향한 교회의 대우에 씁쓸한 기억이 있지만, 여전히 교회를 사랑한다." (26쪽)
"가난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것은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다." (31쪽)
-> 그는 가난의 종식을 교회가 해결할 수 있을뿐 아니라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외침을 보면서 예레미야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렘 20:9, 새번역)
어찌보면 브루그만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환영하기보다 적대하고 그에게서 거리를 뒀을지 모릅니다. 그가 하는 말이 지금의 교회 체계와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주장으로 다가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에서 오늘날 이념적이거나 혁명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비판은 성서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외치는 하나님의 정의는 오늘날 현실을 관통합니다. 마치 성전을 둘러 엎으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작금의 시대는 어찌보면 자본식민주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언자들이 고발했던 하층민들의 삶은 더 빈곤해지고, 빈부격차는 더 커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고 여전히 일하신다는 것을 브루그만의 외침을 통해 저는 느낍니다. 우리의 실천과 신앙이 예언자적 외침을 회복하고 개혁하는 신앙으로 거듭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여전히 교회의 기득권을 누리기를 원하는 오늘의 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종교의 자유가 아닌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의 자유와 희년을 선포하시고, 여전히 시퍼렇게 길들여지기를 거부하실 뿐 아니라 비대해진 교회를 심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성서 읽기를 새롭게 할 이유 - 성서의 다양한 목소리
"여러분은 고대 텍스트와 현재의 상황을 배경으로 '집어삼킴'이라는 이미지를 곱씹어 보면서 이렇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교회에서 이런 성서 본문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까? 왜 이런 본문이 성서정과에서, 그리고 교회가 지닌 믿음의 지평에서 사라진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공동생활에서 복음이 주장하는 바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일러줄 것이다." (69쪽)
"복음은 우리에게 확립된 이해관계라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정의와 의'에 이롭게 ('정의와 의'를 이루는 쪽으로) 성서를 읽으라고 권면한다(요구한다!). 우리가 성서를 그렇게 읽을 때,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된다." (86쪽)
-> 브루그만은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철저하게 성서에서 찾습니다. 특별히 구약성서의 외침은 여전히 성서가 다양한 목소리를 가져오면서 그 자체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복음은 정의와 의에 이롭게 성서를 읽으라고 권면하고 그로써 우리가 행동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쉐인 클레어본이라는 유명한 활동가가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유는 그의 말과 삶이 일치를 가져오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심각하게 제고해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만 그저 비대해져가고 약자들을 위한 자리는 더 비좁아져가기 때문에 말입니다. 부동산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현실 가운데서, 오히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을 가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개혁은 그런 점에서 어찌보면 구약성서의 체다카 정신을 제대로 배우고 그로써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정짓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3. 가난을 종식시키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환대, 관대함, 용서를 실천하려면 탐욕의 문화를 거스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아울러 어떻게 일하는 것이 경제를 바꾸는 최선의 방책인지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치료하소서. 복종케 하소서, 부끄럽게 하소서'라고 끝없이 간구하는 교회를 상상해보라." (159쪽)
"교회가 되풀이 해온 문제는 공적 참여를 거부한 게 아니라 그런 확신을 표명하지 못한 비겁함이었다. 나는 교회가 경제에 관하여 믿음이 제시하는 시각을 분명하게 밝히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새로운 순간에 이르렀다고 본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들이 공동체에서는 그런 주장이 실제로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힘든 임무를 수행하면서 고독과 상실감을 느꼈을 때, 타협하지 않은 '7천 명이 아직'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왕상 19:18). 이렇듯 교회와 회당과 그 밖에 다른 공동체들에는 허다한 민중이, 이웃의 문제에 끊임없이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허다한 민중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런 무리를 모아, 변화를 일으키는 정치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결론, 187쪽)
-> 브루그만은 현실을 새롭게 바꾸는 교회를 상상하도록 이끕니다. 이것이 어찌보면 그가 교회를 향해 품는 예언자적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사야서에서 제시되는 하나님 나라는 굉장히 현실과 동떨어져보이고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브루그만은 명확히 말합니다. 그 성서의 꿈을 하나님은 오늘도 이루시고 변혁하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우리 또한 그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봤을 때 로마사회에서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고 사랑할 뿐 아니라 안전망을 만든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사회복지개론서는 초대교회의 구제와 나눔을 사회복지의 효시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종교개혁가들은 칭의론으로 유럽의 선진복지를 이루어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것은 성서를 있는 그대로 읽고 용기를 가지는 것과 함께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될 뿐 아니라 가진 것도 빼앗기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는 이러한 현실은 절대 하나님께서 심히 좋다고 하신 세상과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경제공부를 하는 것도, 희년을 실천하고 고민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도, 계속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치열하게 읽고 묻고 기도하는 것도 결국 교회를 사랑하고 구약성서에서 여전히 선명하게 체다카와 미쉬파트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렇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자본주의 종식은 어려울지 모릅니다. 빈부격차를 극복하는 것도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력을 품어봅니다. 일생동안 삶으로 학문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가르쳤던 그의 존재를 본받아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함으로, 오늘 가운데 이루실 희년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며 걸어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해보며 책에 나온 기도문으로 글을 마쳐봅니다.
“주님, 우리를 치료하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돕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복종케 하소서
우리는 목이 곧고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를 부끄럽게 하소서
우리의 방종과 우리의 자족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오늘도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158-159쪽, 변형)”

"허다한 사람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반면, 극소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부를 독점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결코 안정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이가 넉넉히 가지고 어느 누구도 너무 많이 갖지 않는 세상을 바라셨던 하나님의 꿈에서 멀어져 버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적 불의‘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바로잡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고 세상 안에 있는 부서진 것을 모두 구속하고 계신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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