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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다 바친 이를 다룬 '9번의 일'이후 3년을 기다려 만난 김혜진 작가의 신작 '경청'.
김 작가 소설 속 주인공 대부분이 그러듯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엄청난 태풍을 온 몸으로 겪고 있다. TV에 수시로 나오고 국민 상담사로 인기를 모았던 주인공 임해수.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배우에 대해 작가가 써준 대본대로 격한 말을 방송에서 내뱉은 뒤 그 배우가 자살하자 말로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했다는 엄청난 사이버 조리돌림을 당한다. 그녀를 살인자로 몰아붙이는 기사는 물론 많은 댓글과 인터넷 불링으로 모든 공적인 삶에서 퇴장당한 그. 배우자마저 결별을 요청하며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집 안에 혼자 남겨진 그는 피해자 부인, 어머니, 자신을 일방적으로 비난한 동료, 상담센터장, 변호사, 기자 등에게 매일 편지를 쓰지만 어느 한 편도 마무리를 못 한 채 부치지 못한 편지를 매일 찢어버리며 자기가 만든 마음의 감옥에 갇혀 버린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 내지 않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진짜 의미와 가짜 의미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녀는 허상을 좇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 찾기 놀이를 그만둔 지 오래다.
결국 그녀를 순무를 돕겠다고 결심한다. 거기엔 어떤 의미도, 이유도 없다. 그런 걸 찾고 싶은 생각도 없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p.47
치료를 기다리던 동네 병원의 복도에서, 고양이 구조를 위해 힘을 합한 10살 아이의 피구경기장에서 한때 셀럽이었던 그녀를 알아본 이들은 친절과 예를 다하지만 처지가 급변한 그녀의 일상을 파헤치기 위한 날카로운 칼날을 감추지 않고 휘두른다. 누구와의 대화에도 자신이 없던 해수는 부모 별거의 상처와 아이들의 따돌림으로 힘들어하는 세이를 만난다. 세이와 함께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고 극도의 경계심을 보인 길고양이 순무를 구출하기 위해 사건 이후 처음으로 타인과 손을 잡는다.
이런 대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가 한동안 경험하지 못했고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장벽 없는 소통.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장애물이 없다.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드럽게 방향을 틀고 서로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말들이 완강하게 닫힌 내면의 문을 열고, 서로의 내면 깊숙이 진입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꼭 닮은 말을 길어 올린다.
꾸밈이 없는 말.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거치지 않은 말. 의도도, 저의도, 악의도 없는 말.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말. 아무런 빛깔도 모양도 부여받지 못한 채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말들. p.181
내담자의 삶을 바꾸기 위해 조언을 하고 자신의 삶은 완벽한 것으로 꾸며야 하기 위해 갈등을 덮고 오로지 앞만 보고 나가야 했던 해수는 세이를 만나며 조금씩 자신을 돌아본다. 직면하기 힘들어 계속 외면해야 했던 고인의 아내를 만나 용서를 빌지만 싸늘한 모멸을 견디고 전 남편과도 차분한 이별을 위한 대화를 덤덤하게 이어나간다. 마침내 힘겹게 구조한 순무를 동물병원에 맡기고 아이의 치료를 기다리며 그녀는 말로 상대를 납득시키고 자신의 행위를 이해시켜야만 했던 상담사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는 법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말들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누른다.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는 그 말들이 철저히 자신의 몫으로 남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들은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결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정기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자신과 마주 앉은 저 여자가 그런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녀는 언어로만 이해하던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아프게 깨닫는다. p.246
정확한 논리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타인을 설득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자기 합리화가 되는 줄 알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 나를 설명하려 할 때마다 조금씩 스스로가 진의라고 믿었던 것과는 어긋나버리고 상대에게는 진절머리를 느끼게 했던 나의 모습들. 지금도 주변에서 많은 이들이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말로 업을 짓고 스스로의 담벼락을 더 높이 세우고 있다. 태풍이 지날 때는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묵묵하게 참아내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 김혜진은 조용히 몸을 기울여 들어보라고(경청하라고)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