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문자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밤중의 바다와 같이 짙은 청록색의 배경. 미모의 여인 뒤로 11명의 그림자가 있다. 서로 친하지는 않은 듯 등을 돌리고 있는데 막상 그 간격은 촘촘하다.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남인 듯 아닌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이들. 도대체 정체가 궁금하다.

사연은 이렇다. 11개의 그림자는 지난여름 요트 여행의 동반자의 것이다. 이중엔 혈연관계도 있지만 대부분 서로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다. 그렇다고 어정쩡한 동반자끼리의 여행이 특이할 것은 없다. 그리고 추억할 만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해 여름 이 여행을 잊지 못한다. 11개의 그림자 중 하나가 죽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상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11문자 살인사건>(랜덤하우스. 2007)의 표지 디자인과 그에 얽힌 이야기다. 20년의 경력 60편의 작품을 가진 이 유명한 작가는 여류 추리소설 작가를 앞세워 연쇄살인 사건의 열쇠를 찾는다. 그녀는 11개의 그림자 앞에 서있다.

이제 독자와 주인공은 하나가 되어 사건의 전모와 범인을 밝히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야 한다. 다만 공통된 비밀은 가지고 똘똘 뭉친 나머지 10명의 벽은 상당히 높으니 인내심을 가지는 게 좋겠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이런 영화가 있다. 막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청춘남녀가 해변을 찾는다. 새로운 세계를 맞을 준비에 흥분한 상태의 이들은 운전도 술도 사랑도 서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중 술과 운전. 결국 음주운전으로 사단이 난다. 누군가를 치고 달아난 것. 끔찍한 여행에서 돌아온 4명을 이에 대해 함구한다.

<11문자 살인사건>도 이와 상당히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11명의 떠난 요트여행에선 분명 사건이 있었다. 그중 한명이 사고로 죽었다고 결론이 났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나머지 10명이 보이는 태도도 그렇다. 잘 숨기고 있지만 어쩐지 냄새가 난다. 거기다 이들 중 몇몇이 죽어나간다. 죽음을 부를만한 비밀과 이를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다.

스크린에서 뺑소니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는 4명의 남녀. 살인이 벌어지기 전엔 어김없이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쓰인 쪽지가 도착한다. 소설도 마찬가지. 한 명이 죽고 나면 나머지에게 ‘무인도로부터 살의를 담아…….’라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한다. 다음 살인을 예고하는 셈이다.

‘어느 살인자의 독백’

그렇다면 연쇄살인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야 끝에 가서 확실해지겠지만 일단 상상은 해볼 수 있다. 허면 그 상상에서 그자는 악(惡)일까.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르니 당연히 나쁜 자일까. 분명한 것은 그를 미워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바로 살인자의 독백 때문이다.

소설은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마지막은 프롤로그에 해당하니 차치하고 나머지 8장은 2개씩 짝을 지어 묶여 있다. 그리고 각각의 앞에는 ‘monologue1,2,3,4’가 자리한다. 그것도 살인자의 심경을 듬뿍 담아서다.

이는 결국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인간 본성을 꿰뚫는듯하다. 피해자가 가해자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현실. 그 앞에서 독자는 범인을 동정한다. 최소한 돌을 던질 수는 없다. 되레 살인만 저지르지 않았을 뿐 훨씬 추악한 존재를 확인하고 치를 떨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끝까지 읽고 볼 일이다.

한편, 재미있는 역자후기가 눈길을 끈다. 옮긴이 민경욱씨의 어린 시절 경험담이 그것인데 추리소설과 도둑에 얽힌 이야기다. 자세한 사정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중학생시절 한창 추리소설에 빠져있었는데 이날도 시험공부를 미뤄두고 추리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범인이 밝혀지는 끝을 보고나자 그에 맞춰 도둑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이불속에서 숨죽이고 있었을 텐데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지른다. 다행히도 도둑은 화들짝 놀라 급히 자리를 떴다.

어린소녀에게 그런 용기를 준 것은 분명 추리소설의 힘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순간 멋지게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이었을 것이다. 용감무쌍한 여성 작가가 주인공인 <11문자 살인사건>도 독자에게 그런 쾌감과 용기를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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