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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애인이 없다. 시간이 없다. 이런 뻔한 이유로 극장의 문턱이 높게 느껴지기에 가끔 보는 영화는 대부분 DVD를 통해서 고르곤 한다. 뭐 마땅히 보고 싶은 영화가 생각나지 않기에 적절한 갈등(혹은 아주 사소하고 유치한 갈등)이 1-2시간 안에 말끔히 해결되는 영화를 선택하게 된다. 감당키 힘들 갈등은 마음을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한 소년의 엄마를 찾아 나선 122일의 여정’은 책을 펼치고 덮는 동안 해소되는 갈등이 아니었다. 과연 이 소년이 그토록 그리워한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를 만나는 동안 엮이는 많은 인물들 간의 열정적인 증오와 우정은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엄마와 아들이 만나는 순간 그들은 사랑을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이런 작위적인 여정을 상상했다면 책을 읽는 잠시 동안의 시간이 편치 못할 것이다.
<엔리케의 여정>(다른. 2007)은 픽션이 아니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의 말머리나 꼬리에 따라 붙은 논픽션의 표식, 때문에 감동이 배가 된다는 그러한 표식과는 다른 현실 자체인 것이다. 물론 아이를 떼어놓고 먹고 살길을 찾아 떠난 엄마와 그녀를 그리워하다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결국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여정을 나선 소년의 이야기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하지만 작가, ‘소냐 나자리오’는 그들의 감정에 작위적인 감동의 가격표를 붙이지는 않는다. 냉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여정에 동참하여 본 것, 들은 것만을 추려내 이야기 해줄 뿐이다. 눈앞의 현실이 아니기에 픽션, 논픽션을 구분하기 힘든 먼 나라 이야기는 때문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 생생함으로 <엄마 찾아 삼만리>보다 적은 눈물 자국을 남기는 <엔리케의 여정>은 눈물샘이 아닌 주먹을, 심장을 조이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가 된다.
엄마가 아이의 손을 뿌리치고 미국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윤택한 삶을 위한 ‘아메리칸 드림’ 때문이 아니다. 그녀들은 살기 위해 가족을 떠난다. 경제적인 자생력이 없는 그네들의 나라에서는 악순환의 고리만을 확인할 뿐이기에 말이다. 가족의 곁에서 입에 풀칠은 하겠지만 하루 한 끼와 세 끼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간신히 아사를 피하는 삶은 그들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교육을 보장할 수 없고, 간신히 발붙이고 사는 환경에서 ‘홈 스쿨링’은 우습지 않은 잔인한 농담에 불과하다. 어머니, 그녀 자신도 그런 환경에서 자리지 않았는가. 간신히 끼니를 때우고 철이 들기도 전에 책상을 떠나 행상의 길을 나섰다. 그 속에서 미약하나마 행복을 주었던 사랑은 뜻하지 않은 임신을 초래하고, 대부분 그 사랑마저 순간의 유희에 그치고 만다. 어쩌면 그녀들에게 사랑이란 사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믿고 의지할 수 없는 남편과의 사랑이 그렇고 자신이 범한 과오를 고스란히 물려줄 자식들에 대한 사랑 역시 그렇다. 그녀들에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으로 가는 것이다. 돈을 벌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좇는 것이다.
엔리케와 비슷한 상황의 아이들이 도저히 어린 나이에 감당키 힘든 여정을 택한 것을 치기어린 사춘기 방황으로 혹은 복에 겨운 철부지 행동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물론 엄마는 그들은 버린 것이 아니다. 또한 그녀들이 힘겹게 벌어 보내준 돈과 선물로 다른 아이들 보다는 물질적으로 나은 삶을 살아간다. 운이 좋으면 좋은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쳐, 엄마의 원대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나간 엄마의 그림자를 앙칼스럽게 부여 쥐고 있는 그들에게 엄마가 부치는 돈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상실감뿐이다. 곧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엄마에 대한 원망만을 키워가면서 그 상실감은 어느새 자신을 잡아먹고 있다. 그들에게 자신을 망칠 기회는 너무도 가까이에 있다. 잠시 동안의 안식을 주는 마약이 지척에 있고, 그것을 소비하는데 큰 어려움도 없다. 상실감에서 오는 격한 투정을 받아줄 사람도 없기에 자학은 더욱 그 강도를 높여간다. 자신을 망칠대로 망쳐버린 ‘엔리케’와 아이들은 결국 엄마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선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나간 엄마와 찾아가는 아이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결국 이민자 전체의 이야기로 넓어진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신의 가족이 있는 땅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 나라에 경제적 자생력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생산과 소비, 그리고 노동이 순환할 틀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노동력(그것도 기술이 결여된 것)뿐이다. 서구 열강의 탐욕스러운 침이 그들의 해변에 처음 떨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그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다. 산업화와 미국의 탄생과 발전의 원동력이었지만 그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재료가 되었을 뿐이다. 때문에 이민자들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은 결코 과대해석이 아니다.
이미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은 학살이 예견된 유대인의 이민을 인종적 우월감으로 거부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제 문제는 그보다 더욱 복잡해졌고 현실은 다를바 없다. 현지인들에게 외면당한 3D업종에 뚫린 구멍을 채워주는 이민자에 대한 수요와 그것이 파생하는 문제 사이에서 이렇다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극단적인 판단으로 해결된 요량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양 단의 조화를 찾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비겁한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가치 판단을 유보할 수 없는 현실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엔리케’의 아이 역시 그와 같은 여정에 동참할지도 모른다는 예상 가능한 결말이었다. 결국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면 그들의 떠날 것이다. 환영의 인사말을 기대하기 불가능한 미국이라는 나라를 향해 그 중간의 잔인한 약탈자들에게 짓밟히고 죽어나가면서도 제2, 제3의 엔리케의 여정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 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힘이 장사인 나라가 지도자의 희생을 발휘할 것인지 아니면 이웃을 짓밟고 폭력을 일삼으며 빼앗은 돈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깡패에 그치고 말 것인지 지켜볼 문제이다. 후자 쪽에 가깝다는 지금의 판단이 바뀔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