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 되풀이되는 연구 부정과 '자기검증'이라는 환상
니콜라스 웨이드.윌리엄 브로드 지음, 김동광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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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자들의 왜곡된 진실. 비단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학문의 전 분야, 사회의 저변에서 이러한 왜곡과 의도적인 조작은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심 많은 우리가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들이 주시하는 것은 문제의 당사자인 과학자가 아닌 그들이 담고 있는 그릇이다. 즉, 골치 아픈 망둥이 한 마리가 아닌 그것이 흐리는 것처럼 보이는 혼탁한 물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지르는 요인을 분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종종 그것을 그들만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곤 한다. 예를 들면 연구비를 타내기 위한 심리적인 압박에서 기인한 탈선행위나 선임연구자와 소속기관에 대한 과도한 아첨식의 데이터 날조 등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그것이 기만행위의 주체가 되는 개인에만 있는 것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사회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중, 고등학교에서 대학의 교육에 까지 실험과목의 경험을 떠올리면, 그것에 과연 실험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는 한 것인지 조차 의문스럽다. 이미 사실로 판단되는 결과를 알고 그에 데이터를 맞춰가는 것을 실험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와 같은 현상에 세상을 우롱하는 과학자 양산의 첫 번째 원인이 있다.

객관적이라는 철옹성안의 과학은 실상 눈 가리고 아옹에 불과하다. 앞서의 예를 학생에 대한 교육적 성과 목적의 수업의 개념으로 제외시킨 다해도 우리가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결과를 미리 예측하거나 기대치에 맞추려는 의식을 갖고 임한 실험은 이미 그 객관성을 잃고 있지만 인위적인 믿음, 즉 전통적인 과학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것이 사실처럼 통용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성과주의에 대한 환상이다.
한국 대학교수의 논문의 양에 대한 지적이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종신 교수직의 안정이 연구하지 않는 학자를 양산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에 커다란 함정이 숨어있다. 바로 성과주의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양적 팽창으로의 호도. 바로 그것이다.

논문이 여러 창구를 통해 게재되지만 그것에 대한 검증은 이뤄지지 않기에 과학자들의 기만은 당당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논문의 양을 연구 결과의 척도로 삼는 이 같은 시각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극명해지는 순간이다. 얼마나 유명한 잡지에, 얼마나 많은 양의 논문이 게재되었는가를 연구자의 성과로 봐서는 안 된다. 수백편의 논문을 양산했더라도 그것이 전혀 인용되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거나 그런 무가치한 논문을 표절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의 속임수를 탄생시키는 모든 책임이 권력계층(엘리트 과학자 자신을 포함하여)과 그들이 쥐고 있는 사회에만 있는 것일까? 대답은 No. 이다. 책에 소개된 구소련 과학자들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종종 권력이 지향하는 바와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기만을 저지른다. 이념이라는 틀을 배반한 기만행위가 결국 자기파멸을 불러 올 것이 불 보듯 뻔함에도 말이다.

결국, 이 책,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미래M&b. 2007)의 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난 날이 선 시선을 갖추자는 것이다. 과학을 객관적 연구행위와 정직성의 수호자로서의 고유명사로 취급하는 구시대적 유물을 과감히 버리고 세상을 기만한 과학자들의 행위가 이례적인 현상이 아닌 과학, 그 자체가 가진 요인으로 보자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것이 과학이라면, 이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에 완전하고 영원한 진실이란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책의 말미엔 ‘베이컨’의 말이 인용된다. “진리는 권위가 아니다. 시간의 딸(시녀)이다.” 지금이 바로 이 짧은 말이 담고 있는 함축적 의미를 새삼 되새길 때이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사실로서 영속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과학이 영원한 진리를 규명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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