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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2006년 겨울호 - 통권 3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설익은 과일 서리는 그것이 달고 맛있기 때문에, 그래서 꼭 먹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친구들 사이에서의 호기, 혹은 우정다짐 때문에 이뤄지고, 지나서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간직된다. 도둑질이라는 뜨끔한 이미지를 서리라는 구수한 추억으로 포장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도리어 누군가에게 적발 당했을 때 그 추억은 더욱 값지게 저장되니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분기탱천할 노릇이지만.
훔치고 싶다는 달뜬 욕망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소유욕을 느껴봤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그것이 이유 없는 심리적인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훔치다’라는 감정은 ‘가지고 싶다. 그러나 보편타당한 방법의 능력이 없다’로 귀결된다. 미치도록 가지고 싶어서 택한 어쩔 수 없는 도둑질. <풋, 겨울호>(문학동네. 2006 겨울)에 담긴 훔침의 대상은 그러한 애증의 산물이다.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는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구시대의 방패로 서점의 책을 쌔비고, 그것을 밤새워 읽으며 내용까지 철저하게 훔쳐내는 누군가의 이야기와 지금의 길을 일러준 감동적인 포스를 소유한 대단한 작가 ‘김승옥’을 소유하고자 하는 그녀의 사연은 그렇게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애증이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갈무리된 두 사람이니까 말이다.
세상을 훔치겠다는 각오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글, 독자의 마음과 자신의 인생을 훔치는 작가의 글, 그것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앙금이 남는 감동을 느끼게 하는 이유에 생생한 욕망이라는 것 하나를 끼워놓는 것이 그리 무엄한 일은 아닐 것이다. 훔침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가 형태를 갖춘 사물에서 보이지 않는 마음에 까지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주며 우리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훔쳤고, 훔치고자 하는가? 도적의 잣대를 들이대면 궤변에 그치고 말지도 모르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선뜻, ‘도서관의 책이요. 여자친구의 입술이요.’ 라며 대답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글쎄요. 마땅히 떠오르지 않네요.’ 하는 것이 더 쓸쓸한 일이 아닐까. 훔치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또는, 그런 자들에게서 지키고 싶은 것이 많은 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깊어질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