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위한 정의 - 번영하는 동물의 삶을 위한 우리 공동의 책임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이영래 옮김, 최재천 감수 / 알레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완전한 채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창 채식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하면 이따금 그 배경이나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왕이면 그럴듯한 답을 하고 싶은 어린 마음에 책을 이유로 들자고 생각했다. 우연히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이라는 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 책을 읽은 후 어려움 없이 대답했다. 피터 싱어의 책을 읽은 다음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책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메시지—동물도 생명이며 생명은 소중하다—를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답에 꽤 만족해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이불킥, 흑역사 그 자체다. 왜냐하면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적 접근법은 동물의 세계가 놀라운 다양성과 포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이 접근법은 동물의 권리에 관해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취약하다.


불의는 피해뿐 아니라 고의든 과실이든 부당한 방해에 의해 중요한 삶의 노력이 차단되는 것을 뜻한다.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인간의 이익과 충돌하는 상황이 오면 우리는 매번 동물의 권리 대신 눈앞의 이익을 택한다. 얼마나 많은 동물이 인간에 의해 원치 않은, 피해 갈 수 있었을 불의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어야 했는지를 알게 되며 인간이 한 일이 부끄러웠다. 인간 중심적이고 오만하며 단순한 유사성으로 호소하는 “우리와 너무 비슷해서” 접근법, 동물이 중요한 건 오로지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는 칸트주의적 접근법, 윤리적 문제를 오로지 쾌락과 고통에만 결부시키는 공리주의 접근법 등은 모두 인간을 기준으로 한,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한 동물 권리였다. 이 접근법들은 동물을 위한 정의를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의 언어가, 철학이, 법규가 이토록 빈약했다니!


그런데 <동물을 위한 정의>의 마사 너스바움은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 이름하여 역량 접근법. 역량 접근법은 노력하는 생물에게 번영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번영할 기회란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건강을 누리고, 신체 완전성을 보호하고, 감각과 상상력을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으며, 삶을 계획할 가능성을 갖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놀고 쾌락을 즐기고, 다른 종 및 자연계와 관계를 맺고, 자신을 주요한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의 목록을 의미한다. 생물에게 번영의 기회를 부여하는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물의 정의를 위한 이론뿐 아니라 인간 정의를 설명하는 이론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동물을 위한 정의>는 동물 권리를 역량 접근법으로 접근하는 철학적 이론을 제시한다. 읽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동물을 동물원에 가둘 권리, 생명의 위협을 할 권리, 자유로움을 빼앗을 권리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음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동물과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땅, 지구. 하지만 인간은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고, 그로 인해 동물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고 있다. 너스바움은 분명히 말한다. 이 동물들은 그곳에 있고, 그곳에 있을 권리가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내쫓을 권리가 없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역량 접근법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 아니라 법규가 마련돼 전 세계적으로 동물의 권리가 지켜지는 날이 오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지 않는 달
하타노 도모미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사지사로 근무하고 있던 스물여덟 살의 가와구치 사쿠라는 손님으로 만난 마쓰바라가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며 관심을 표하자, 그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오랜만에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어 들뜬 것도 잠시. 만난 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사쿠라는 마쓰바라의 본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이상적인 여자 친구 모습에 사쿠라가 맞추기를 강요했고,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은 채 제 생각만 강제했다. 결국 사쿠라는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렇게 끝났으면 참 좋았으련만, 마쓰바라는 사쿠라를 스토킹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것이라 믿으며. 


<지지 않는 달>이 그려내는 스토킹 범죄의 끔찍한 진실은 스물여덟 살의 생기 넘치는 젊은 청년을 한순간에 바스러질 것처럼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는 가해자에게서 오는 일차적인 가해뿐 아니라 주변에서 수군대는 이차적 가해를 통해 더 사지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사쿠라는 이별 이후 직장을 잃었고, 집을 여러 차례 떠나야 했고,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고서는 밖을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절망하고 있는 피해자를 도울 수 없을지언정 제대로 처신하지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책망하는 인물, 그리고 그로 인해 더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쿠라가 <지지 않는 달>에 묘사되었을 때는 뜨끔했다. 혹시 나도 내심 사쿠라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짐을 하나 더 얹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인 사쿠라, 스토킹 범죄자 마쓰바라의 관점으로 번갈아 진행되는 <지지 않는 달>. 너무 사실적이라 읽는 게 벅찼고, 심적으로 힘들기까지 했다. 큰 피해가 생기지 않는 이상 그 심각성은 인지되지 않고 법은 개정되지 않는다는 말. 결말을 읽은 후 다시 생각하니 씁쓸하기까지 하다. 스토킹 범죄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하고는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피해자 사쿠라뿐 아니라 읽던 내게도 생각의 전환점이 된 구절. 나쁜 건 그 남자예요. 그 남자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일이에요. 이런 짓을 하는 놈이 나쁜 거예요. 가와쿠치 씨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유난스럽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요. 아니, 이 일은 유난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해요. 아무 일도 없으면 그걸로 다행인 거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 - 기후 변화와 식량 위기로 포착하는 파국의 신호들 서가명강 시리즈 34
남재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래를 생각하면 기대보다는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이상 기후로 매해 점점 갈수록 심해지는 자연재해를 겪을수록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한숨만 나오는 암울한 미래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런데도 배워야 한다. 생각해 보면 가까운 미래가 아닌 현실이니까. 기후 변화와 코로나19 같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건과 더불어 전쟁 등으로 물가가 치솟는 것을 우리는 모두 목격했다. 세계화의 장점만 보고 배웠었는데, 참 부정적인 방식으로 ’위 알 더 월드‘를 느끼게 될 줄이야. 남 일 같지만 놀라운 현실. 식량 위기가 우리에게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식량 위기를 겪을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쌀 소비량은 점점 줄고 있고, 가격 면에서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업은 21세기에 들어서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식탁은 현재 수입산으로 풍족하지만, 기후 변화나 전쟁 등으로 식량 조달에 문제가 생기면 직격탄을 맞게 된다. 


농업의 미래는 이미 변한 기후에 적응해서 식량 안보를 지켜주는 것이다. 변화된 기후에 적합한 새로운 품종과 재배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사실 안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군인의 강한 이미지만 연결하곤 했다. 하지만 이 심각성을 깨닫고 나니, 식량 안보가 대안이라는 것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동안은 식료품 가격이 오르면 간접적으로나마 전쟁과 기근, 폭염 등의 결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계점을 넘어서면 우리는 그동안 생각지도 못한, 말 그대로 식량을 위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IPCC 과학자들은 1.5도가 되는 시점을 2033년 정도로 예상했다. 최악의 조건이라고 하는 2도가 되는 시점은 2054년으로 전망했다. 암울한 미래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마지노선인 1.5도까지 0.4도가 남아 있다는 것. 한 번 톡 치면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지구가 망가지기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떨까?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서 육식, 특히 소고기 섭취를 줄이는 것이 한 방법이다. 아예 끊지는 못하더라도 줄이는 것. 내가 아는 것을 실천하면 임계점에 다다르는 시점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읽는 사람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 영국의 책사랑은 어떻게 문화가 되었나
권신영 지음 / 틈새의시간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읽는 것뿐만 아니라 책이 있는 공간까지도 사랑하는 나, 비정상인가요? 여행지에서 시간과 동선과 동행자들만 허락한다면 서점은 한두 군데 꼭 방문하고, 생각 정리할 때 책 속에 파묻혀 몇 시간이고 씨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뒤,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는 왜 이렇게 책을 좋아하며, 도대체 책에 무슨 힘이 있길래 나는 소위 말하는 ’책 덕후‘가 된 것인지! 공교롭게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책으로 알게 되었다. <책 읽는 사람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영국의 책사랑은 어떻게 문화가 되었나>라는 책을 통해서.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부터 나는 내 문학적 취향이 미국이 아닌 영국임을 알게 되었다. 느껴지는 깊이와 내공이 다르다고나 할까? 그래서 영국의 책 문화에 대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나니 그 차이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영국에서 책은 서구 근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통로다. 개인주의와 사회적 연대를 구현하는 책 읽기 문화는 ‘이야기 듣기’로부터 시작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영국인들의 책사랑은 예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온 것이었다. 바로 스토리 타임을 통해서. 


두터운 어린이 독자층은 영국 아동 문학 출판 산업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J.K. 롤링의 <해리 포터>가 영국에서 출판된 것은 어쩌다 얻어걸린 우연이 아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 봤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매일 잠자기 전 책을 읽어주셨고, 미국에서 거주할 때는 학교에서 꼭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책 읽어주는 시간이 있었다. 반 전체가 함께 이야기 듣는 시간이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내 책 사랑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겠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책에 친숙해지도록 하는 시간이 내게 충분히 주어졌음에 얼마나 감사하게 되던지! 


책보다는 휴대폰을, 긴 호흡이 필요한 장문보다는 짧은 글을, 시간을 들인 숙성함보다는 즉자적이고 신속함을, 문자를 읽고 ‘생각’하기보다 영상을 보고 ‘느끼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에 책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과 비난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반지성적 흐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토론 문화가 필수이고, 토론을 위해서는 좀 더 긴 글을 읽고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책 덕후로서 책의 역사를 살펴보며 느낀 것은 책의 중요성과 읽기의 필요성이었다. 영국의 책사랑 문화가 몇백 년 걸려 정착했음을 살펴보았는데, 부럽기도 하고 질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들었던 결심은, 책을 더 열심히 읽어야지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꼭 영국에 가보리라! 손흥민 선수의 EPL 경기를 직관하고 싶어서 런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읽다 보니 영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는 희망 사항이 생겼다. 뭐 어때! One can drea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원인이 된 우유부단함의 끝판왕, 루이 16세. 사치로 국고를 낭비하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를 말했다는 진정 ’깨끗한 뇌‘의 소유자, 마리 앙투아네트. 이렇게만 생각했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읽어보기를 권한다. 진실과 정의가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산다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선동을 목적으로 한 인물이 그려질 때, 여론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정의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왜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역사는 어디까지나 승자의 편이기에 패자의 기록은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츠바이크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실과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 진짜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순진무구함. 나이가 어림. 생각이 짧음.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음.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은 말괄량이 그 자체였다. 열여섯 살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소녀다움을 잃지 않았다 평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남들이 뛰어놀 시절에 프랑스 황태자비가 되었다. 책 읽기보다는 놀기 좋아하고 사람과 있기를 즐겼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지성이나 교양을 겸비할 틈 없이 높은 자리에 올랐고, 그를 향한 백성의 사랑과 귀족의 찬사는 평범한 한 소녀를 들뜨게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대함만을 느꼈을 뿐 그것에 따르는 책임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활짝 핀 얼굴로 거리낌 없이 왕좌에 올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이 소녀는 왕좌에 앉으며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되자 사치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어리석은 청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온 세상 사람들도 모두 즐겁고 근심이 없으려니 여겼다. 유리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20년 동안이나 진정한 민중과 진정한 파리를 그저 지나치기만 한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연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고.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왕실 태생에 소위 말하는 ‘꽃길’만 걸어온 사람이라 평민의 삶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평생을 온실 안 화초로 살았는데, 온실 밖의 삶을 궁금해할 틈 없을 정도로 그의 삶은 쾌락과 향락에 찌들어 있었다. 그의 무지와 무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렇게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실추시키며 온 세상에 밉보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목숨과 왕권, 그리고 자녀들을 지켜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고서야 그녀는 스스로에게서 저항의 힘을 찾았다. 그리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지성과 행동력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편지에 써 내려갔다. “인간은 불행 속에서만 자신이 누군가를 알 수 있게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위기에 빠져 왕관은 물론이고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위엄을 보인다. 루이 16세는 여전히 우유부단했다. 그는 왕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주변에 도움을 청한다. 탈출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권위를 빼앗아 간 자들에게 대항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은 내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삶을 살았으며 백성의 모본이 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나,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선으로 소설 초반을 의도적으로 이끈다. 고작 열여섯 밖에 되지 않은 딸을 타국에 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불안한 시선과 심정. 독자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엄마 마음’ 가지고 바라보게 만들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지에 혀를 차는 것이 아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도록 했다.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결말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어떤 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어쩌면 우린 너무나도 쉽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평가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토록 복잡한 삶을 살았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