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 크리스천 맞아? ㅣ 이어령 대화록 2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3년 2월
평점 :
북리뷰 #70 [당신 크리스천 맞아] 이어령. 2023 (분야 : 인문학, 교양 인문학)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고, 이화여대 교수,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최고의 지성인 중 한 사람 이셨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지난 2022년 2월 26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는 원래 기독교와 신앙을 철저하게 부인했던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뒤늦게 70이 넘어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셨다. 그 당시 그 뉴스는 한국의 교계에서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궁금증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최고의 지성인이던 그는 어떻게 '지성에서 영성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일까? 무엇이 그의 마음과 영혼을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준 것일까?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가 크리스천이 된 이후에 삶 속에는 어떠한 변화가 생겼을까? 참된 신앙, 참된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소유하게 된 믿음과 신앙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시기에, 이제는 생생한 육성으로 그 분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과거에 남겨놓은 책과 인터뷰, 강연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다. 이번에 읽은 책은 故이어령 선생님이 다양한 장소와 매체에서 주고받았던 대화, 인터뷰, 간증, 강연 내용들을 책으로 묶어서 출판한 것이다.
책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면서, 그 분께서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셨는지, 그리고 크리스천이 되신 이후에 어떠한 삶의 변화가 있었는지, 어떠한 가치관을 추구하며 사셨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을 통해서, 과거에 나누었던 故이어령 선생님의 대화에 간접적으로 함께 참여하면서, 그 분이 평생 추구하고, 의지하고 살아온 '지식', '지성'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하게 되었다. 믿음의 세계로, 영성의 세계로 들어와 보니, 자신이 붙잡고, 추구하며 살았던 지성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언어였음을 깨닫게 되셨다고 하셨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앙은 자신의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언어의 세계를 한 차원 더 확장케 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故이어령 선생님의 대화록을 읽다 보니, 두 인물이 생각났다. 하나는 20세기의 최고의 변증가인 C.S 루이스,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이다. C.S 루이스도 젊은 시절 철저한 무신론자에,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회심한 이후에 그의 훈련된 지성은 영성의 세계를 설명하고, 변증하는 일에 아름답게 사용이 된다. 사도 바울 역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란 지성인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직접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예수의 존재 및 신성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박해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이후에, 예수를 변증하고, 예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다.
C.S 루이스, 사도바울, 故이어령 선생님
세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라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故이어령 선생님을 그리워하시는 분들
故이어령 선생님의 문학작품과 책을 좋아하는 분들
故이어령 선생님의 지성과 영성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
신(하나님)의 존재와 믿음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분들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인터뷰 내용, 간증, 강연 등의 내용을 보기 좋게, 그리고 읽기 쉽게 정리해서
출판해주신 열림원 출판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p.21
E.M 포스터가 쓴 소설이 있는데, 박사 학위논문을 쓰려고 어마어마한 자료를 가지고 시골의 장원으로 가게 된 청년이 마중 나온 옛날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나요. 그곳의 별장지기였던 거지요. 마차를 타고 가는데 큰 협곡을 지나다가 그만 마차가 갑자기 기우뚱 기우는 바람에 논문을 쓰려고 준비한 엄청난 자료들이 골짜기로 떨어져버립니다. 겨우 책 몇 권을 구하죠.
절망한 그에게 옛 친구가 시골에서 지내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것을 들은 그 청년은 책 속에서만 살았던 자신의 생을 돌아다보게 됩니다. 배운 것은 없어도 육체노동을 하며 자연 속에서 흙, 바람, 나무... 이런 시골에 묻혀 사는 것이 뒤떨어진 삶인 줄만 알았던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 거지요.
p.21-22
지식인들이 마지막에 생각의 상자나 지식의 상자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지막에 지식을 버리는 단계에 이르러야 그의 삶을 판단할 수 있는데, 저는 거기에도 못 미친 도중에 책이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그런 걸 이제야 알았나 싶어 창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는 것과 절실하게 느끼고 깨닫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p.23
신앙이 아닌 다른 얘기에 대해서라면 나는 내가 가진 지식으로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대상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앞에서는 지식도, 지위도, 돈도, 아무런 의미도 없고 모두 평등하지요. 나에게 문학을, 세계정세를, 문명을 얘기하라고 하면 진짜 잘난 체하죠. 하지만 신앙에 대해서 라면 내가 지금껏 쌓아온 지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p.25
진화론이란 자연현상을 부분적으로 설명한 데 불과해서 본질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는 질문에 답을 하고 과정을 설명하죠. 그런데 그게 무엇이냐, 왜 그렇게 됐냐, 무엇을 위해서냐, 라고 물으면 입을 다물죠.
p.26
그러니까 과학적 사실과 존재의 진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과학자 얘기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건 존재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지 전체 속에서 생명의 질서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p.27
저 역시 이십 대 때 실존주의 철학, 사르트르, 카뮈 등에 탐닉했습니다. 키르케고르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도 공부했고 감명을 받았는데, 이제 내가 신자가 된다고 했을 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차원이 달라진 것이지요. 내가 해온 것을 바라볼 줄 아는 또 하나의 시선이 생긴 것입니다. 내 언어를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가 생긴 거죠. 그것이 바이블의 언어들이죠.
p.33
이 세상을 떠날 때 내가 웃으면 남은 사람은 울어주고 내가 울면 남은 이들은 웃는 거예요. 빙그레 웃으며 떠나는 것, 그게 참되고 아름답고 즐거운 삶이고 창조적인 삶입니다. 하루하루를 창조해라. 그것이 제가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요.
p.34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건 실제로는 받았으면서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생명이 그렇지요. (중략)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 그 생명을 준 분이 누구입니까? 우선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지만 부모님께 생명을 준 존재는 누구입니까? 이 생명의 근원에 무엇이 있나요? 이 생명의 근원이 있었기에 우리가 기쁨을 느끼고 빛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p.35
나는 교회 가서 우는 사람들, 할렐루야 하고 우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습니다. (중략) 그런데 지금은 알겠어요. 그 사람들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이런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p.36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죽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란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그래서 내가 예수를 안 믿었거든요.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살고 싶어 하는데 나를 사랑해서 붙들려 하는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이렇게 원통하게 떠나게 하십니까? 당신은 눈물이 없으십니까? 이게 마지막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 아니고 영생을 약속하셨다면 그렇지 않죠. 죄지은 사람들은 슬픔으로 끝을 맺지만 그 죄가 멸해지면 영원한 삶과 사랑을 누릴 수가 있다. 그 순간이 이 세상의 모든 걸 바쳐서 감사하는 거죠.
p.37-38
지식은 생명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생존하다가 삶을 잃어버렸고, 지식 때문에 지혜를 잃어버렸고, 정보 때문에 지식을 잃어버린 세대가 우리에요. 그러니까 생명을 갖고 사는 게 아니라 정보를 갖고 사는 거예요. 이제 생명 단계까지 올라가야죠. 정보에서 지식으로, 지식에서 슬기로, 슬기에서 생존으로, 생존에서 생명으로, 우리는 교회에서까지 자꾸 정보를 구하지 생명을 구하지 않습니다. 정보를 구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구하러 교회에 가는 사람은 나날이 드물어지고 있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의 고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