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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
정애리 지음 / 놀 / 2020년 12월
평점 :
마음을 비운다는 게 뭘까. 나이를 먹으면서 삶의 비밀을 하나씩 터득해 나가고 있다. 무척 더디지만. 욕망과 욕심으로 꽉 찬 젊음을 보내고, 흰 머리가 삐죽삐죽 나오는 나이가 되었다. 나무의 나이테로 보면 다섯 바퀴를 돌았다고 할까. 하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는 현실에 몸부림을 친다. 어느 노 시인이 자신의 산문에다 칠십이 다 되어도 아직 삶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삶을 안 다는 건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기까지 했다.
어느 날 문득, 낯설게만 느껴지던 시집을 펼쳤다. 한 문장, 한 문단을 곱씹고 되새기면서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에 와 닿았다. 묵직함이 느껴졌다. 시인이 표현할 수 있는 시어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도 그렇게 다가왔다. 조곤조곤 들려주는 저자의 목소리가 얼굴과 함께 떠올랐다. 버려진 우산에서 삶을 읽고, 짓뭉개진 열매의 흔적을 좇으며 마음으로 시를 쓰는 삶. 저자가 일상에서 시를 발견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건 지난 3년간 1,000회가 넘도록 꾸려온 EBS 라디오 「정애리의 시 콘서트」의 영향이 크다. 저자는 이때를 시험 문제로만 만나온 시가 ‘살아서 내 안으로 걸어온 시간’이라 밝히며, 뉠 데 없는 마음을 시어로 달래 보기를 권한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는 저자가 손수 고른 시 몇 편을 감상과 함께 실었다. 지난한 하루의 끝에 쉼표를 찍듯, 지친 마음 한 자락을 시에 걸쳐두고 잠시 쉬어도 좋을 일이다.
페이지마다 글과 함께 있는 어여쁜 그림들이 눈에 밟히고,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여운은 깊게 남았다. 누군가에 선물로 주고 싶은 책이었다. 표지 디자인도 깔끔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괜찮다, 괜찮아. 내일은 더 괜찮아.” 라고 무겁게 내려앉은 아픔을 어루만지며 조금씩 나아가는 삶을 얘기해주는 듯했다.
또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갑갑한 심정때문인지 소소한 일상이 그리웠다. 어머니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친구들과 캠핑을 하면서 술을 곁들어가며 정답게 나누던 일들. 모임이 많지는 않지만 그나마 있었던 모임까지도 참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보니, 지금까지 있었던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우린 무엇인가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게 욕망이든, 돈이든, 물질이든, 욕심이든. 무한대의 소유욕으로 경쟁을 부추기며 살아간다. 그래프로 보면 좌에서 우로 상승하는 직선만이 지상의 목표인양, 하향곡선은 허용하지 않는다. 비워야 다시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현대인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듯. 채울 수 있으면 비울 수도 있다. 채우는 방법만 알지 비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우린 비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비우는 방법을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하나씩 비우다보면 어느새 몸에 배고, 축적이 돼서 다시 채울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싶다. 계속 채우기만 하니까 기형적인 사회가 되고 만다. 이 책을 읽으며 욕망의 덩어리를 하나씩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