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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평점 :
추석이 오긴 전 오전근무만하고 덕수궁에 들렀다. 어딘가 가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일었다.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게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아서였다. 덕수궁 쪽으로 발길이 옮겨진 것은 몸에 익은 반응이었으리라.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을의 전령이, 푸르다 못해 맑고 청량한 하늘에 양떼구름을 몰고 왔다. 그 순간, 구름 사이로 쨍하고 햇빛이 눈에 들어와 눈을 못 뜨게 했다. 손을 들어 차양을 만들었다. 그 틈 사이로 천상의 하늘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양떼구름이 슬로비디오를 찍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한낮의 열기는 꺾여있었다. 두툼한 양복을 뚫고 가을바람이 살갗에 닿았다. 구름이 바람에 흩날리며 발길을 고궁으로 유인한 이유가 있었다. 젊은 아빠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아이 손을 잡고 전시회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을 부여잡는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다. 동시에 삼중통역사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박래현, 삼중통역사’ 라는 플랜카드가 세로로 가을바람에 펄럭였다.
지적 호기심에 끌려본 적이 있는가. 그날, 그 장소에서 내가 그랬다. 줄리언 반스 또한 2015년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전시된 ‘빨간 코트’를 입고 서 있는 사뮈엘 포치의 초상화를 처음 본 후, 지금껏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19세기 외과의사 사뮈엘 포치에게 깊이 매료되어 이 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과히 운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줄리언 반스는 뜻밖에도, 사전트의 그림에 기품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묘사된 부인과 의사이자 사교계의 명사 사뮈엘 포치를 통하여 이 시절로 접근해 들어간다. 포치가 펼친 그물은 넓기도 하여, 많은 것이 무너지고 많은 것이 잉태되던 이 복잡한 시기의 전모가 어느새 그의 맥락으로 자리를 잡는다. 반스는 소설가적 통찰과 재료를 다루는 섬세한 손길과 그만의 산문으로 독특한 전기를 기록하여, 벨 에포크가 사랑한 아름다움을 짙은 그림자와 함께 우리 눈앞에 펼쳐놓는다. 포치는 이처럼 편안하고 사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임과 동시에 선진적인 병원 관리와 수술로 수많은 생명을 구한 뛰어난 외과 의사였고, 병원 개원식에 당시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사회적 명망을 얻은 인사였다.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지켜낸 한 인간, 그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았던, 그저 비길 데 없는 자기 자신으로 살았던 평범한 영웅 사뮈엘 포치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제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포치가 살았던 시대도 당시 문학 작품과 미술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유롭고 아름답기만 한 시대가 아니었다. 철저한 편견과 배제, 계급이 공고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포치 자신은 그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옮은 것’을 추구하고, ‘장식적인 쇼핑’만을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고, 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나며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최대로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맙게도 결함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일종의 영웅으로 내세우고 싶다.” 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었지만 소신대로 자기소임을 다 하고 간 한 사내의 이야기가,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전할 것이다.
즐거우리만치 강박적인 탐구 작업. 예술가는 서로 통한다,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 꽂히면 들이파고 예술로 승화시킨다. 이 점을 높이 산다. 내가 삼중통역사, 박래현에 꽂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파일럿 피쉬처럼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인지 아닌지 확인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