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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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1984나 마거릿 애투우드의 시녀이야기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특징은 통제된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미래의 암울한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그러면 현재가 유토피아가 아닐까 하고 잠깐 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 머리를 강타하는 그 무엇이 경종을 울린다. 자칫하면 현재도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고, 귀에 대고 속삭인다. 조심하라고 하면서. 여기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게 된다. 미래는 현재를 발판 삼아 가는 거니까.

 

하지만 여기에 제대로 된 도전장을 낸 소설이 있다. 바로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이다. 디스토피아와 페미니즘의 결합으로 보면 시녀이야기와 흡사하지만, 이 소설은 보는 시점이 다르다. 시점이 미래가 아닌 과거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것도 봉건제 시대의 여자들의 억압된 삶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하는 점이다. 바로 이 독특한 소설의 설정이 이 소설의 특징이자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점이다.

 

모든 여성이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도록 통제된 세상.

 

얼마 전에 팔목에 찬 걱정임계치라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구상한 적이 있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걱정임계치가 1을 넘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설정이었다. 근데, 이와 아주 흡사한 소설을 접하고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내용은 다르지만 설정이 비슷했다. 하지만 페미니즘 소설이 아닌 점이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내 생각을 훔치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 언젠가는 꼭 쓰고 말 거라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근데, 의문점이 하나 들었다. 왜 여성들을 제물로 삼는지 모르겠다. 여성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 디스토피아 세계를 구축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겠지만. 좀 더 큰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을 제물로 삼는 것은 너무 비겁하고 옹졸하니까.

 

하지만, 이 소설 그들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다. 한창 말 연습을 해야 할 어린아이부터 뇌의 손상으로 인해 언어를 잃어버린 노인까지, 여자라면 누구나 손목에 카운터를 차고 하루 100단어까지만 말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들이 101번째 단어를 말하는 순간, 손목에는 전기 충격이 가해지고 카운터의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충격의 강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카운터는 말 많은 여성들의 손목에 화상을 입히거나, 심한 경우 기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루 100단어 제한을 두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입을 닫게 만든 대통령과 순수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세뇌당한 남성들. 국가의 주요 사안을 관장하는 기관뿐만 아니라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모든 일자리에서 내쫓기고 집 안에 갇힌 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갓 대학을 졸업한 남성들도 모자라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미성년 남학생들까지 노동을 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파격적인 혜택을 뿌려대는 정부. 이렇게까지 해가며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올바른 세상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소설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분에서 억압과 통제를 받아온 그들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시점, 남성에 대한 불신이 정점을 찍게 되는 바로 그 시점을 보여준다. 결국 이 소설 속 여성들은 침묵하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진의 딸 소니아와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은 본의 아니게 입을 닫아버리게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야 할까? 침묵하는 여자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 과연 그들의 결말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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