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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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는 과연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정조를 요구하면서, 과연 상대방이 행복하길 원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정조라는 것에 구속되어 행복할 수 없는데도 정조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데도 정조나 희생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삶의 통찰을 묻는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살면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목을 사랑과 우정의 법칙이라고 정한 이유가 있다. 과연 사랑 앞에서 우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운명적인 결합에 자신을 불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정열 앞에서 도망쳤고, 다른 한 사람은 진실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침묵했다. 그리고 그 두 남자는 사십일 년 만에 만나 진실이 무엇인지 파헤치려고 한다. 경험상, 사랑 앞에서는 우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까? 인간은 자신밖에 모르니까. 자기 자신이 최우선이므로, 자신에게 빗대어 타인을 보게 되면, 그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희생정신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가슴을 콕콕 쑤시고 옥죄이는 통증을 감수한다면 모를까.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그 중에 장군이 화자로서 이야기 전체를 혼자 이끌어간다. 거의 혼자 질문을 하고, 대답도 혼자 한다. 마치 무언극은 아니지만 팬토마임(pantomime)을 보는 것 같다. 찰리채플린이 혼자 팬토마임을 할 때 몽환적인 표정에 쓸쓸함이 배어 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모함과 공모, 배신으로 점철된 인생의 쓴맛 뒤에 오는 헛헛함과 공허함이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독백과도 같은 이 짧은 소설에 투박하고 정제되지 않은 그 어떤 감정이 스스럼없이 투과되고 있었다. 딱히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예전에 있었던 어떤 감정이 떠올랐다. 삼십년 넘게 잊고 살았던, 십년 전 글쓰기 때 잠시 스쳐 지나갔던 잊지 못할 그 장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삼각관계와 흡사한 얘기라고 치자. 불륜이라는 이 소설의 결말과는 다르지만. 그러면 이 책의 결말은 어떨까? 읽다보면 무척 기다려지니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마력이 숨어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대답은 반전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상대방 친구의 현답이 그것이었다. 질문자가 그 최종 대답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책망이 숨어있다. 진실을 파헤치려고 했지만, 그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하고 이 소설은 아쉽게도 끝이 나고 만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 들은 것이나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무어라고 할만도 한데, 오히려 대답을 거절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말하는 열정이란 과연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움과 사랑. 아니면 연인 또는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두 남자간의 대화에는 아직 자존심이 남아 있다. 장군은 어렵게 찾아낸 그녀가 간직한 정직의 책을 불태우고 또다시 묻는다. 그러나 친구는 여전히 대답을 회피한다. 당신이 그 친구의 입장이라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나? 우문현답의 그 현답이 기다려진다. 참고로 사십일 년이라는 세월이 그 현답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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