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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귀환의 서사. 돈과 핏줄. 가족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김범 장편소설 『할매가 돌아왔다』는 돈이 전부인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일생을 인정받기 위한 제니 할머니의 투쟁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화냥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 조선, 1637년(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은 약 6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만 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이 귀국하자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적지에서 고생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들이 오랑캐들의 성(性) 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고 하여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몸을 더럽힌 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병자호란 이전 임진·정유 양난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환향녀들은 가까스로 귀국한 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는데, 선조와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
과연 누가 제니 할머니를 화냥년이라고 비웃을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할매가 돌아왔다』는 사실 진지한 이야기이다. 숨 가쁜 우리 역사에서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삶의 궤도를 수없이 바꿔야 했던 우리의 수많은 할매들에 대한 소설이다. 어떤 역사보다 중요하지만, 어디서도 말할 자리가 없고,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들의 눈물과 회환. 이 소설의 유머가 가볍게 잊히지 않고 우리를 바짝 긴장시키는 것은 바로 뒤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역사에 대한 주제 의식을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할매가 돌아왔다』의 엉뚱 캐릭터 제니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67년 만에 돌아온 자신을 쫒아내려 하자 유산 60억이 있다는 말로 집에 눌러 앉고, 돈을 무기로 효도 경쟁을 시키면서도 돈에만 관심 있을 뿐이라며 가족들을 꾸짖는다. 가족들도 조금씩 할머니의 기막힌 사연을 이해하고 갖은 오해를 풀게 된다. 역사의 피해자이자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피해자, 그래서 측은하게 여겨지면서도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할머니의 화려한 귀환이다. 독자들은 남몰래 60억 원을 바라고 있는 자신의 속물성을 발견하고 뜨끔해 하면서도, 돈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이 독한 할매의 유쾌한 반란이 부디 성공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옛 서사시부터 현대소설까지 모험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남성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성의 이야기는? 여성에게 허락된 서사는 보통 잔류의 서사이고, 떠날 수는 있다 하더라고 떠나는 즉시 잊히는 서사였다. 그러니 여성 귀환의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할매가 돌아왔다』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 문학사에 의미 있는 사건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에 대한 혐오감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그대로 남아있다. 유명 여자 연예인이 자신을 비하하는 댓글을 못 이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 현실을 비추어볼 때, 예나 지금이나 이성에 대한 불평등은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 않으니 말이다. 인식의 개편이 필요한데, 약자인 여성을 보호할 의무가 남자에게 있는 것이다. 아니 이런 말도 필요 없다. 독립체의 한 인격으로써 그 자체를 인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평등, 참 어렵고 난해한 단어다. 가깝지만 먼 그런 단어. 손에 잡힐 것만 같지만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와도 같은 단어다. 하지만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그걸 부정하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부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더 튼 모래 탑을 쌓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