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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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을 따를 것인가, 실리에 편입할 것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질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게 옳든 아니든 간에. 현대인들에게 신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들에겐 신념이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생소할지도 모른다. 편한 것을 찾고 실리를 추구하다보니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드문 이유일 터이다. 신념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은, 단정 짓기는 뭐하지만 바늘구멍을 통과해 천국으로 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싶다.

신념과 가치관이 종교와 결합되면 그것은 최고조로 극대화된다. 목숨까지 저버리는 실로 무서운 일까지 발생한다. 그렇다고 실리의 편에 서는 사람들을 쥐구멍으로 몰고 가면 안 된다. 삶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므로 누가 잘못했는지, 잘 했는지, 잘잘못을 따지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최후의 만찬』은 유교와 서학의 충돌 속에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정조의 심리뿐만이 아니라 순교 소식을 듣고 신앙이 흔들리는 정약용의 심리를 마치 그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그려낸다. 정약용은 “곡기를 끊고 기도에 묻혀도 글 속에 잠재된 천주의 신념은 허기”로 왔으며 “ 순교의 그루터기에서 윤지충은 살아남은 자들의 신앙을 더 어렵게” 했다고 생각한다. “약현, 약전, 약종 형들을 향한 조정의 탄압이 두려웠고, 자신을 겨냥한 노론의 사찰이 두려웠다.” 『최후의 만찬』은 이처럼 새로운 이념·정치·종교가 조선에 밀려오기 시작한 무렵의 대격돌의 현장 속에 살아간 정조, 정약용, 윤지충과 권상연, 감찰어사 최무영, 도화서 별제 김홍도 등의 인물과 도향과 도몽, 박해무, 배손학 등의 서학인을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매력은 새로운 사상 앞에 놓인 인물들의 “짙은 향기를 풍기는, 무지개 같은 결과 무늬를 지닌” 심리묘사뿐만이 아니다. 중세 로마 피렌체의 다빈치의 불후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 머나먼 조선에서 온 불우한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흔적을 발견하는 발상부터 예사롭지 않다. 또한 순교한 여령(女伶)의 여식 도향이 『왕가의 비기』에 기록된 ‘불을 다룰 수 있는 돌연변이’라는 설정 또한 소설을 읽는 맛을 더하게 한다.

편입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그나마 가공할 두려움(정양욕의 사례처럼)으로 인한 개인의 선택은 옳을 수도 있지만, 부패한 권력이나 돈에 의한 선택은 그릇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비견 멀리 가지 않아도 현대 정치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집단 이기주의 또는 개인 이기주의로 인해 편을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싸움판이 되기 일쑤인 혹세무민의 정치판을 볼 때, 가슴이 조여 오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도 신념과 실리가 있을진대, 과연 어느 것을 쫓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반면 개인들은, 일반 소시민들은 어떨까. 오히려 속세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념의 소유자가 아닐까싶다. 국민들을 무서워해야 하는 이유다.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사람들은 위대함을 넘어 영웅인 셈이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들이야말로 바늘구멍을 통과해 천국으로 가야할 사람들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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