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은 통하기 마련이다. 다른 예술 장르를, 가령 미술이나 음악을 소설의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는 많이 보았으나, 반대로 소설가가 미술에세이를 쓰는 경우는 생소한 일이 아닐까싶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가수가 소설을 쓰거나 배우가 그림을 그려 출품하고 영화감독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발견하니 말이다. 이 말인즉슨, 예술은 통한다는 말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는 있으나, 부럽기는 하다. 하나를 이루기도 어려운데 둘 이상의 대업을 달성하다니,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도예가의 깊은 장인 솜씨에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듯, 예술을 통하게 하는 그들에게 신은 위대한 영감을 선물한 것이다.

 

오랜 시간은 영감을 끌어내는 도구다. 이는 장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반스도 25년간 그림에 대한 글을 써왔다. 다양한 예술, 문학잡지에 예술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읽어온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자주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지 알 것이다. 레몬 테이블에서는 소설가 투르게네프와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는 배우 사라 베르나르와 사진작가 나달이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는 소설가 플로베르가, 시대의 소음에서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소설 전체를 독차지한다. 그리고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에서는 화가 제리코와 그의 그림 <메두사호의 뗏목>에 대한 세심한 분석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이는 그의 관심사가 소설의 글감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로 시작하는 이 책의 첫 장의 내용은 실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게 했다. 파멸의 뗏목에 갇힌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의 시체를 먹을 수밖에 없는 비이성적인 행태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글 솜씨에 역시 소설가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고 이토록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소설가밖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단지 상상력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위의 내용 말고도 이 책의 가치를 높인 것은, 캔버스 뒤에 숨은 그림자를 들여다본 집요하고도 흥미진진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세부적인 것들을 포착해내는 타고난 소설가의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반스는 독창적인 해석과 직관적인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림 한 점을 두고 이렇게나 할 말이 많다니, 그림을 그리는 화가보다 더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그 어느 책에서도 쉬이 말해주지 않던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의 눈길을 붙잡는다. 반스는 그렇게 뻔한 비평 대신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다가와 지극한 즐거움을 선사하며 그림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다. “미술을 보는 눈이 뜨였다”, “더 많은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다라며 독자들도 이 새로운 형태의 그림 에세이에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특히, 캔버스 뒤에 숨은 그림자를 보는 반스의 눈은 예술의 미덕이나 진실성은 개인의 미덕이나 진실성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들통 나게 되어 있다고 일갈하면서도 당대의 또는 후대의 수많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그의 결론은 미술 앞에 선 수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사람은 죽어도, 화가는 죽어도, 소설가는 죽어도, 예술가는 죽어도 예술은 살아남아 계속 숨을 쉬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한다. 새로운 시각을 뜨게 해준다. 그런 반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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