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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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지오웰이 말하는 가공의 세계에 갇힌듯하다. 선을 공격하는 위험한 존재들은 눈을 부릅뜨며 그들의 사냥감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고, 그들은 멈출 수 없는 기차처럼 폭주를 하며 악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손오공이 된 듯하다. 판에 짜인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며 틀에 갇힌 허약한 인간이 된지 오래다. 우리는 여지없이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왜 우린 늘 순한 양처럼 약자로서 살면서 그들이 저지르는 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그들의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성차별과 인종차별과 계급사회 그리고 폭력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우리네 현실. 나는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다소 희귀한 제목의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먼저 이 책에의 주인공을 분석해보면, 앞서 말한 ‘그들’이라는 위험한 존재를 조지오웰은 ‘빅브라더’로 대치하고 있고 J.M. 쿳시는 ‘나’라는 치안판사와 ‘졸 대령’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 있다. 그들은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의 쌍두마차 격이 된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전자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렸고 후자는 과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했다. 그러면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폭력과 억압, 통제의 사슬로 드러나는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의 모순과 허구라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로서 전자는 ‘빅브라더’를 통해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렸고 후자는 인종차별적이면서 불평등을 대변하는 가상의 인물로서 ‘야만인’을 만들어냈다. 둘 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단, 전자는 가해자이고 후자는 피해자라는 것뿐이다.


그러면 상상에 의한 공포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 우리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경험한 바 있는 그 끔직하고 잔인한 공포 말이다. 허상 속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그 무엇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그 무엇 때문에 반복되는 역사의 딜레마에 빠져있는가. 왜 우리는 약자일 수밖에 없는가. 이 시점에서 우린 철저히 따져볼 때가 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는 알았으니 한 번 따져보자는 얘기다. 이 책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이런 마음이 들도록 부추겼다. 과거에 집착하는 철없는 분노보다는 냉철한 머리로서 예리한 심판의 잣대를 드리우고 미래를 향해 한 발 전진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리며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


또 하나의 관점은 우리 안에 잠재된 괴물의 본성을 말하고 싶다. 치안판사인 ‘나’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어떻게 보면 졸 대령이나 제국주의 군인들보다 더 사악한 인간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는 야만인들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는 피해자로서의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실상은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음탕한 가해자로서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곤 한다. 즉, 평화주의자면서 인도주의자인척 하지만 여자를 성노리개로 삼아 비열하고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이것도 모자라 자기 합리화하는 이중인격자의 속물근성에서는, 정말 구역질이 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결국에는 야만인 여자가 자신을 따르지 않겠다는 거절의사를 밝히고 떠나는데, 그녀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반신반의를 하는 대목에선 탄성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이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측면과 맞닿아 성의 타락으로 온 나라가 출렁이는 우리 현실의 민낯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야만인인가? 허의적인 유혹자인 ‘나’, 제국 군인인 ‘졸 대령’, 아니면 ‘우리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측면도 볼 수 있는데, 나는 그걸 문학적인 측면에서 찾고자 한다. J.M 쿳시의 책은 처음 읽었지만 문학적인 취향이 나와 흡사해서 인생 책으로 뽑을 만큼 그의 매력에 흠뻑 빠졌음을 시인한다. 중간 중간 자연 묘사하는 서정적인 글과 주인공 ‘나’의 생각을 그대로 표출하는 내면 묘사는 필사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달콤하면서 유려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봤는데 다음번에는 그의 자전소설 3부작을 꼭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다시 한 번 통렬하게 뒤돌아보며 반성하고 점검하는 좋은 시간과 계기가 되었고, 앞선 여러 가지 질문들의 대한 명제가 우리의 숙제로 남았음을 밝히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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