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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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무엇일까.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행복한 삶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란 무엇인가.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한 동안 끙끙 알은 적이 있다. 그렇게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고민의 고민이 겹쳐 두터워진 층이 생기고 탄탄해진 무언가를 발견할 때도 있지만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도 풀지 못한 딜레마로 남아있다. 이 책에서도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질문이 나오는 대목이 있다. 누구라도 이 질문을 받게 되면 아마 그 자리에서 입이 얼어붙어 바로 대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늘 철학적인 사고로 무장한 철학자이거나 종교적인 성자라면 모를까. 이 책의 주인공은 위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생을 살아온 붉은 장미 ‘로즈’이다. 로즈는 붉은 색만큼이나 정열적인 여성이었다. 약하거나 무기력한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이었다.


요즘은 형형색색의 장미가 여럿 있지만 그녀에게는 붉은 색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색은 범상치 않는 그녀의 삶을 대신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도 파란만장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명제를 몸소 경험하고 꿋꿋하게 버티며 사는, 험난한 인생의 파도에 굴복하지 않는 여성상을 저자는 인물묘사부터 내면심리묘사까지, 말 그대로 한 여자의 일생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마치 열편의 단편이 원래 의도대로―연작소설을 염두하고―구성한 플롯을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각 단편들의 이어짐이 짧은 단편의 단점(단편은 항상 끝이 애매모호하게 끝이 난다)을 극복해냈다. 마치 저자가 거지소녀가 아니었나싶을 정도로 말이다.


전체 뉘앙스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흡사하다. 그리고 첫 장부터 시작해서 책을 덮을 때까지 로즈의 심리묘사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그것을 압도할 만큼 강렬했고 인간의 감정을 하나하나 뜯어놓고 찧어놓는 냉철함과 정교함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다 반전에 반전을 가하는 서술기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리소설을 연상케 했고, 그 흡입력은 정말 대단했으며, 순수문학은 재미없다는 통설을 한 칼에 무너뜨렸고, 이 소설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 견인역할을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시간의 간격이다. 읽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뒤로 훌쩍 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갑자기 어린아이였다가 중년이 되고 급기야는 노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편으로서 장점이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목이 여기에 있다. 이는 시점이 과거, 미래, 현재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처럼 울렁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장을 한두 장 뒤적이다 보면 어느새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며, 결국엔 감탄사를 자아내고 저자가 숨겨놓은 장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 독서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전편에서 나온 상징들이 후편에서도 계속 나오는데, 가령 버스터미널이라든가 관절염, 양로원, 편지, 연인 등 상징적인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때, 그 단어를 만나면 익숙한 탓인지 반갑기도 하지만 아 여기에 또 나오네, 하며 의문을 갖게 된다. 물론 그 단어 속에 숨겨져 있는 암시는 우리들이 캐야하는 보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문체에는 치밀함과 숙련된 노련함이 보이는데, 이는 저자의 다년간 노력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펴보니 줄친 부분이 여백보다 많을 정도였다.


이 책은 열편의 단편들로 엮었는데, 장편처럼 읽혀지는 이유는 주인공이 같다는 데에 있다. 그 내용을 주제중심으로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엄한 매질’에서는 가정폭력에 대해 다뤘고, ‘특권’에서는 싸움과 섹스 그리고 도둑질로 얼룩진 로즈의 학교생활을. ‘자몽 반 개’에서는 로즈의 자존심을. ‘야생 백조’에서는 성폭행을.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거지 소녀’에서는 패트릭과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결국 파경을 겪게 되는 가난한 소녀 로즈에 대해. ‘장난질’에서는 불륜을. ‘섭리’에서는 이혼과 신의 섭리, 못 만날 운명에 대해. ‘사이먼의 행운’에서는 행운, 상실, 행운, 불행이라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인생을. ‘스펠링’에서는 가족과 양로원을. ‘넌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니?’에서는 종교, 번역을 통해야 알 수 있는 감정들을 묘사했다. 이 내용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만만한 주제가 하나도 없음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 종교와 죽음까지 통틀어 다루어졌다. 여기에서 인간의 본질과 희로애락에 대한 저자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하나의 단편은 금과옥조로서 버릴 게 하나도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스펠링’에서는 가족의 유대감과 한 인간의 말로를 그렸는데, 눈시울을 적시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단막극 같았다. 그리고 두 모녀가 양로원에서 나눈 대화는 내 뇌리에 각인되어 시시각각 떠오르는 불청객이 되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가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 그 증상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것은 사회의 편견과 타인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용감한 여성으로서, 끝내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인간의 욕망에 의해 증오도 했고 빗나간 사랑도 있었지만 결국, 핵심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문단은 니체의 말로 끝맺음을 해야겠다. ‘삶이라는 것은 심연위에 걸쳐있는 밧줄과 같다. 건너가는 것도 힘들고, 돌아서는 것도 힘들고, 멈춰서 있는 것도 힘들다.’ 이 문장의 울림이 로즈의 울림이고, 나의 울림이다. 그리고 앞서 서두에서 질문한 대답이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긴 터널을 뚫고 지나온 기분이 들지만, 타인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흥분했고 분노했으며 눈물을 흘렸고 감탄했다. 그리고 놀랐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할 만큼. 그러나 현실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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