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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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sf 소설의 새로운 매력을 알게되었다. 무의식적으로 sf는 무척 차가운 장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sf 영화에는 항상 감정과 관계, 사랑이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원했던 어린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담긴 A.I나, 아내의 죽음 이후로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해 꿈속으로 뛰어든 인셉션이나...가장 최근에 본 영화 컨텍트도 그랬다.

sf는 언젠가 미래에 정말 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멀고 먼 우주로 떠나거나, 발전한 안드로이드가 있는 미래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고, 살아가기 때문에 많은 감정과 함께한다. 나는 그게 무척 좋다. 그 미래에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어쩌면 어떤 가능성이 실현될지도 모른다. 물론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미래가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 미래에서도 더 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처럼.

<어떤 물질의 사랑>에서 본 세계도 그랬다. 따뜻하고, 간질간질하고, 혹은 차갑고 씁쓸하기도 하고. 현실에서 느꼈지만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이 세계에서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어떤 물질의 사랑‘이었다. 따뜻하고 다정하고 달콤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외계인이고, 어떤 비밀이 있다고 해도 그럴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는 지구. 내가 원하는 사랑이었다.

가장 슬펐던 건 ‘그림자 놀이‘와 ‘마지막 드라이브‘.
그림자 놀이의 주인공 이라가 받은 수술의 목적이 너무 이해가 됐다. 타인의 고통은 tv에서도, sns에서도, 그리고 주변에서도 쏟아져들어오고 그 아픔을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일부러 그 모든 것에 거리를 두었던 적이 나도 있어서 그림자 놀이의 이야기가 무척 슬펐다.
안드로이드의 사랑 이야기는 이상하게 마음이 더 아프다.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여서,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겪는 비극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서, 안드로이드는 정작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을 읽다가 blue room도 들었다. 인간의 욕심이자 자기만족일지라도 안드로이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미래의 이야기지만 결국 지금의 이야기고, 내가 겪은 과거의 이야기는 더욱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앞으로도 어떤 가능성이 실현된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를 만나고 싶다면 당신도 주저하지 마시길.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든 나는 이렇게 대답해줄 테니까.
그렇군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혹시 배꼽도없으신가요?
- P153

"라현아, 끊임없이 사랑을 해. 꼭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어도 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존재를 만나. 그 사람이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너를 찾아올 사랑이니까."
"응, 그럴게."
"너는 지구인이니까. 네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까. 지구인일 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지만 그건 걱정 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서로에게 외계인이니까."
"응, 알겠어."
"결국 너는 너야. 끝까지 무엇이라고 굳이 규정하지 않아도 돼."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고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 P153

상처받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보호막이었어.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지쳐있었으니까.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나를 비롯해 곁의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감정을 잃더라도 모두가 감내할 수 있다고 믿었어. 세상은 더 평화로워질 거야. 분쟁과 전쟁이, 다툼과 사냥이 전부 사라질 거야. 간결하고 깔끔하게 지구가 변하겠지. 우리는 그게 간절했어. 네가 있었다면 너 역시도 수술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어. 그러니까 도아야, 나는 내가 너를 잃더라도 너를 이 세상에서 지킬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게 했을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이해할 수도 없을 거고.
내가 지금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 P196

"좀 더 행복할 것 같나요?"
"잘하면?"
"행복하면 인간은 어떻게 되나요?"
한나는 오래도록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래."
더미가 반짝이는 창밖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더미가 노래를 불렀다. 쳇 베이커의 ‘블루룸‘이었다. 자동차는 속도를 유지하며 연구실로 향해 갔다. 마지막 드라이브를 향해,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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