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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여행 가방 ㅣ 미래그림책 203
이네세 잔데레 지음, 아네테 멜레세 그림, 용희진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26년 9월
평점 :

[여행하는 여행 가방]
여행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여행에 필요한 옷가지와 물건들일까, 여행지에서 가져온 기념품일까?
아니면 아직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비밀스러운 이야기일까?
"아무도 모르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
라는 시구를 반복하며 독자의 호기심을 키운다.
길쭉길쭉 기다랗고, 큼직큼직 커다랗고, 홀쭉하지도 납작하지도 않은
누구도 번쩍 들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거운 가방.

비행기를 타고 다소 편안할 줄 알았던 가방의 여행은 비행기의 재채기와 함께 바깥으로 떨어지면서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빙글빙글 아래로 떨어지는 가방.
열기구, 높은 산들을 지나치며 아래로 아래로~
깊은 바다, 사막, 정글, 북극/남극, 화산 도대체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어딘가에 도착하게 된 여행 가방은
'바로 그 때' 한숨을 돌리며 씨익 웃고는 꽉 다물었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 있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데...
가방 속 비밀은 뜻밖에도 철새들이다.
여행 가방과 철새라니!
라트비아가 우리나라처럼 철새들이 오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출판사 리뷰'를 통해
알지 못했어도 이 둘을 연결하여 시를 쓸 생각을 하신 것이 놀라웠다.
이 책의 글을 쓴 이는 라트비아의 시인 이네세 잔데레,
그림을 그린 이는 그림책 [키오스크]로 잘 알려진 아네테 멜레세다.
시인의 언어와 그림작가의 상상력이 만나 한 편의 시가 환상의 세계로 날아오른다.
반복되는 말의 리듬과 경쾌한 운율은 소리 내어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그림은 글 속에 감춰진 상상을 눈앞에 펼쳐 놓는다.
글과 그림은 서로의 이야기를 보태면서 독자를 현실과 상상의 경계 너머로 이끈다.
시인의 언어와 그림작가의 이미지가 만나 여행 가방 하나를 환상의 문으로 바꾸어 놓았다.
여행과 철새가 만나 한 편의 시가 되고, 비어 버린 가방이 다음 이야기의 가능성이 된다.
시는 꼭 어렵고 낯선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말 한마디와 기발한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현실 너머의 세계로 데려간다.
'여행'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흔히 낯선 곳으로 떠나는 사람과 그 여정에 필요한 가방 등을 떠올린다.
이 책의 뜻밖의 비밀이 된 철새에게도 여행은 있다.
계절을 따라 하늘을 가로지르고, 멀고 먼 길을 날아 마침내 돌아갈 곳을 찾는 여행.
가방이라는 작은 공간 안,
인간의 여행을 위한 물건인 줄 알았던 가방이 알고 보니 철새들의 여정을 품고 있었다니.
익숙한 사물과 자연의 생태가 이토록 절묘하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반복되는 시구를 따라 가방 속을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시의 리듬에 몸을 싣고 상상의 여행을 떠난다.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저마다의 답을 품지만, 정답이 드러나는 순간
상상은 끝나는 대신 새로운 세계로 뻗어 나간다.
가방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집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난 생명들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철새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가방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개미들이 들만큼 ^^
무언가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흔히 빈자리부터 바라본다.
무엇이 빠져나갔는지, 무엇이 없어졌는지 살핀다.
하지만 이 그림책에서 가방이 비었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여정이 무사히 끝났다는 뜻에 가깝다.
가방은 철새들을 품어 주었고, 철새들은 제자리(집)를 찾아갔다.
여행의 끝이 집 도착이라면
돌고 돌고 돌았어도 가방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바로 그 때' 가방이 한숨을 돌리며 씨익 웃더니, 꽉 다물었던 지퍼를 열자
가방 안에 있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바로 그 때'를 즉 타이밍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생각해보게 된다.
돌고 돌고 도는 와중에 예기치 못해 가방이 열렸대도
어찌 어찌 그 나름의 방향대로 흘러갔을 것이지만,
(철새들은 날 수 있는 존재므로~^^;)
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와르르 쏟아낼 '바로 그 때'를 나는 알고 있는가?
그런데 이야기는 그 빈 가방을 마지막으로 닫아 버리지 않는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가방은 "내일이면 다시 채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이 참 좋게 다가온다.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를 맞이할 수 있는
가볍지만 충만한 상태이기도 하니까.
한 편의 여행이 끝난 자리에 다른 여행이 시작되고,
한 이야기가 떠난 자리에는 아직 만나지 못한 이야기가 찾아올 수 있다.
가방이 비었기에 다시 채워질 수 있고, 끝났기에 또 시작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여행가방은 여행을 하는 여행가방이다.
여행가방도 여행을 한다라~ 맞는 이야기인데,
여행은 사람만 하는 거라는 생각이 강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여행 가방과 닮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수많은 만남과 경험을 '안'에 담고 살아간다.
때로는 오래 품었던 것을 내려놓고,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새롭게 받아들인다.
무엇이 들어있는지조차 다 알 수 없는 마음의 가방을 메고 저마다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 어느 날, 무언가를 비워낸 자리에서 비로소 다음 여정을 시작할 여백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무도 모르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
책장을 덮고 나서도 이 시구는 마음 속에서 되풀이된다.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어쩌면 앞으로 무엇이 담길지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가방은 이제 어디로 떠나게 될까?
그 안에는 또 누가, 무엇이 담기게 될까?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내일이면 다시 채워질 그 가방의 다음 이야기가.
참, 이 책의 바코드도 실제 여행가방에 붙여있는 바코드 스티커처럼 붙여져있다.
책을 받자 마자 첨엔 실수했나? 했다가...와~ 이걸 의도했다고? 하면서 웃음이 났다.
# 서평단에 뽑혀, 출판사에게 책 제공받았으나, 진심 재밌게 읽고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