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
김희재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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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통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책을 덮고 쉬었다가 다시 펼치기를 반복했다. 소설 속 네 여성의 이야기가 고통스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이 그 고통을 지나치게 담담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비명도 과장도 없이, 마치 오래된 흉터를 만지듯 담담하게 건네지는 이야기들이 오히려 더 깊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폭력을 하나의 사건처럼 이해하려 한다. 어떤 일이 있었고, 누군가는 상처를 입었고, 시간이 지나 회복하거나 극복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구조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폭력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삶의 방식이 된다. 어떤 소리는 오래도록 귓속에 남고, 어떤 공포는 몸의 움직임과 표정, 침묵의 습관 속에 스며든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여성들은 살아남았음에도 여전히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말보다, 어쩌면 견디며 지나간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가장 어려웠던 지점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이해의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왜 떠나지 못했는가, 왜 견뎠는가, 왜 침묵했는가. 소설은 그것을 설명하거나 변호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해진다. 사람은 언제나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려움과 무력감, 죄책감과 생존이 뒤엉킨 상황 속에서 삶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통쾌한 복수도, 완전한 치유도, 희망적인 화해도 없다. 삶은 그저 고통 이후에도 이어진다. 기억은 잊히지 않고,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삶은 좋은 기억보다 좋지 않은 기억을 더 선명하게 남긴다. 우리는 잊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잊지 못한 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야기의 힘 때문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말하는 일, 혹은 끝내 말하지 못했던 것을 글로 남기는 일. 그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자기 삶을 다시 붙드는 방식처럼 보였다. 기억을 온전히 정리할 수 없어도,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존엄에 가까워 보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성’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폭력의 기억이든, 상실이든,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슬픔이든. 쉽게 부서지지 않는 감옥 같은 기억 안에서 살아가다 문득 누군가와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혼자 글을 쓰며 자신을 겨우 붙들기도 한다. 완전한 회복은 없을지 모른다. 다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건네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아주 조금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책은 내게 담담함이 반드시 평온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오래 고통 속에 머문 끝에 울음 대신 담담함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의 평온해 보이는 얼굴 뒤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물게 만든다.

#우리는한때같은성에살았고 #김희재 #다산책방 #소설추천 #도서추천

*도서증정 @dasanchaekbang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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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트 이코노미 - 비트코인에서 밈까지, 오늘의 경제를 말하다
카일라 스캔런 지음, 서정아 옮김, 정승혜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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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경제를 숫자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금리와 물가, 성장률과 주가처럼 측정 가능한 것들이 경제를 설명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다르게 흘러간다. 같은 숫자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희망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불안을 말한다. 같은 시장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기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위기를 본다. 그렇다면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과연 숫자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믿음과 기대일까.

『스트리트 이코노미』를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저자는 숫자와 그래프를 넘어 인간의 믿음과 욕망, 기대와 불안이 어떻게 현실 경제를 형성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경제를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는지, 미래를 어떻게 기대하는지가 소비와 투자,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기대가 행동을 만들고, 그 행동이 다시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지만, 사실 화폐의 가치는 집단적 신뢰 위에 존재한다. 저자는 고가의 와인 시장을 예로 들며 인간의 믿음과 욕망이 사회적 영향을 통해 얼마나 쉽게 형성되고 왜곡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래된 포도주 한 병이 수천 달러에 거래되는 것처럼 화폐 역시 사람들이 그 가치를 믿기 때문에 작동한다. 경제는 객관적 사실만으로 유지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합의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이 책은 경제 성장의 이면도 놓치지 않는다. 생산성은 계속 증가했지만 임금은 정체되고, 자산 가격은 오르는데 주거 불안은 심화된다. 팬데믹 기간 동안 상위 계층의 자산은 크게 증가했지만 많은 노동자는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이 경제 정책에서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주택을 투자 자산으로 바라보는 시선, 저임금 구조에 의존하는 세계 경제, 금융 시스템의 과도한 비대화 역시 사람들의 삶보다 자본의 흐름을 우선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의 문제는 수많은 요인이 결합해 발생하며, 해결책 역시 하나가 아니라 여러 요소의 조합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한 이론이나 정책이 모든 답을 줄 수 없으며, 중요한 것은 균형과 적응 능력이라는 주장에도 공감하게 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애와 공정함, 협력이라는 가치 역시 인상적이다. 경제는 흔히 냉정한 숫자의 세계로 여겨지지만 저자는 경제의 기반이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둘 때 사회는 점점 더 불안정해진다. 경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의 흐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메시지가 책 전반을 관통한다.

『스트리트 이코노미』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현실 경제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무엇보다 경제를 단순한 숫자와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확장해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제 뉴스는 매일 쏟아지지만 정작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왜 사람들의 체감과 경제지표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지 설명해주는 책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의 경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결국 이 책은 경제를 통해 인간을, 인간을 통해 다시 경제를 바라보게 만든다.

#스트리트이코노미 #경제상식 #도서추천 #경제학 #서평

*도서증정 @sejongbook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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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 : 유럽의 뿌리 현대지성 클래식 75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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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 유럽의 뿌리』는 로마제국이 끝내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북방 세계, 로마의 바깥에 존재하던 게르마니족의 풍속과 문화를 기록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이는 낯선 민족에 대한 민족지 혹은 역사 기록처럼 읽힌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남는다. 타키투스는 왜 굳이 게르마니족을 기록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 책을 오늘날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책은 단순히 “게르마니족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당대 로마인이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타키투스가 묘사하는 게르마니족은 용맹하고 검소하며 공동체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반면 로마는 이미 사치와 권력 다툼, 정치적 타락 속에서 오래된 시민적 덕성을 잃어가던 제국이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게르마니족은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어쩌면 로마가 잃어버린 무엇을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게르마니아』는 단순한 역사서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는 야만과 문명의 경계를 탐색하는 텍스트이며, 동시에 권력과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로마인은 게르마니족을 ‘야만인’이라 불렀지만,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그 야만성의 기준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도시와 법, 거대한 문명을 가진 로마가 과연 더 인간적인 사회였는가. 혹은 진보한 사회가 반드시 더 건강한 공동체를 의미하는가. 타키투스의 시선은 이러한 질문과 통찰을 독자 앞에 남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책이 현대에 와서 얼마나 위험하게 오독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20세기 나치 독일은 『게르마니아』 속 묘사를 이용해 ‘순수 게르만 혈통’과 북방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주의적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타키투스는 혈통 우월성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로마를 비판하고 성찰하기 위한 대비물로 게르마니족을 소환했을 뿐이다. 결국 문제는 텍스트 그 자체보다도, 그 텍스트를 누가 어떤 욕망과 권력 속에서 읽는가에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게르마니아』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고대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타자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특정 집단을 이상화하거나 낙인찍는 방식, 그리고 민족주의와 권력이 어떻게 고전을 자신의 언어로 재가공하는지를 함께 읽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마니아』는 과거의 책이면서 동시에 놀랍도록 현대적인 책이다. 어쩌면 이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을 정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우리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그 위에 투사하고 있는가.

#게르마니아유럽의뿌리 #서양고전 #현대지성클래식 #도서추천 #서평

*도서증정 @hdjsbook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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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준비하는 시간 - 세상을 바꾸는 위험한 생각은 어떻게 살아남고 확산되는가
갈 베커만 지음, 손성화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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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라고 하면 거대한 변화가 한순간 폭발하듯 세상을 뒤집는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혁명을 준비하는 시간』은 그 익숙한 이미지의 방향을 거꾸로 돌린다. 혁명은 가장 시끄러운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조용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세상을 바꾸는 위험한 생각은 처음부터 다수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너무 급진적이고 낯설며, 기존 질서를 위협하기에 쉽게 배척된다. 그렇기에 혁명의 진짜 시작은 늘 소수의 은밀하고도 끈질긴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갈 베커만은 혁명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생각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확신을 얻어가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처음에는 너무 낯설어 쉽게 말해지지 못했던 생각이,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다듬어지고, 공감 속에서 응집력을 얻으며, 마침내 하나의 공동체적 열망으로 자라나는 순간들. 책은 바로 그 느리고 조용한 성장의 시간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디지털 이전 시대의 느린 소통 방식을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으로 바라본다는 점이었다. 답장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생각은 그 시간을 통과하며 숙성되었다. 저자는 바로 그 느림 덕분에 사유와 연결이 점진적으로 축적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수정하고, 반박당하며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가는 과정. 혁명은 어쩌면 그렇게 미완의 생각을 오래 견디는 인내 속에서 자라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지금 시대를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즉시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작은 사건조차 빠르게 공론화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거대한 개방성은 생각이 충분히 자라기 전에 소진되게 만들기도 한다. 너무 빨리 소비되고, 너무 쉽게 비난받으며, 때로는 충분한 논의조차 거치기 전에 사라진다. 저자가 말하는 ‘고요한 시간’과 ‘반쯤 닫힌 공간’이 오늘날 다시 중요해 보이는 이유다. 모두가 지켜보는 곳에서는 생각이 성장하기보다 방어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책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결국 혁명을 움직이는 힘은 기술이나 매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편지든 청원서든 신문이든 소셜 미디어든, 그것은 도구일 뿐이다. 진짜 변화는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에 당위와 결의를 부여하고, 현실 속에서 실제 행동과 결속을 만들어낼 때 가능해진다. 저자가 현장 조직화와 공동체적 신뢰를 강조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단순히 분노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함께 움직일 이유가 있을 때 움직인다.

『혁명을 준비하는 시간』은 혁명의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빠르게 사라지는 시대에, 세상을 바꾸는 생각은 어디에서 자라날 수 있을까. 저자는 그 답이 여전히 조용한 공간, 쉽게 소모되지 않는 대화, 그리고 오랜 시간을 견디는 연결 안에 있다고 말한다.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 오래 품어온 위험한 생각이 마침내 현실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혁명을준비하는시간 #인문 #도서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도서증정 @across_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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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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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이상한 감각에 빠진다. 분명 현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동시에 오래전 기억 속 어딘가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소설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쥐스틴과 그곳의 노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단순히 “누군가의 삶을 들은 이야기”라기보다, 인간의 기억과 침묵, 사랑과 상실이 겹겹이 쌓인 거대한 감정의 방을 지나온 듯한 여운이 남는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소설의 장르적 감각이다. 처음에는 잔잔한 휴먼 드라마처럼 시작된다. 요양원이라는 공간, 나이 든 사람들의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쥐스틴의 다정한 태도는 마치 한 편의 에세이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의 삶을 조용히 받아 적고 기억해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설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오래된 가족의 비밀과 죽음, 감춰진 관계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미스터리처럼 변하고, 때로는 범죄 스릴러를 읽는 듯한 긴장감까지 생겨난다. 또 어떤 장면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비밀이 뒤엉킨 막장극 같은 흥미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런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설은 장르를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이동하면서도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읽는 동안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된다. 고전소설 같다가도, 추리소설 같다가도, 누군가의 인생을 기록한 회고록처럼 느껴지는 이 카멜레온 같은 분위기가 굉장히 신선했다.

발레리 페랭의 문체 역시 그런 변화무쌍한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녀의 문장은 아주 오래된 사진첩을 천천히 넘기듯 기억과 감정을 불러낸다. 특히 이 소설에는 ‘듣는 사람’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시선이 담겨 있다. 쥐스틴은 단순히 이야기를 수집하는 인물을 넘어, 상대의 기억을 묵묵히 들어주고,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며, 때로는 비밀을 침묵 속에 간직해준다.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소설 안에서는 아주 깊고 의미있게 전달된다.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은 잊혀지는 존재들에 대한 찬가이다. 요양원의 노인들, 오래된 사랑,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들,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비밀들까지. 소설은 그런 것들을 다시 현재로 불러와 아름다운 순간에 빛을 비춘다. 인간은 결국 기억 속에서 한 번 더 살아간다는 듯이.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소설이 끝까지 인간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결핍과 상처, 욕망과 후회를 품고 있다. 누군가는 비겁하고, 누군가는 잔인하며, 누군가는 진실을 숨긴다. 그런데도 작가는 그들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 역시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게 된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깊은 온기처럼 느껴졌다.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은 빠르게 소비되는 이야기와는 반대편에 있는 소설이다. 천천히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 오래된 감정을 꺼내 보이며,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준다. 읽는 내내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낡았지만 따뜻하고, 어딘가 슬프지만 이상하게 오래 곁에 남는 이야기. 그래서 이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부터 다시 시작된다. 독자 안에서 아늑히 계속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요일에잊힌사람들 #발레리페랭 #소설추천 #도서추천 #서평

*도서증정 @ellelit2020 (가제본)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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