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뱀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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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타고나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완성도 높은 ‘초기작’이 나올 수 있을까. 1985년에 집필된 그의 첫 소설이자 오랫동안 미발표로 남아 있던 작품이 이 정도의 밀도와 설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 소설에 대한 찬사는 단순히 “재미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통 스릴러와 누아르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치밀하게 충족시키면서도, 블랙코미디의 요소로 경쾌하게 읽힌다. 사건은 정교하게 배치되고, 복선은 은밀히 심어지며, 반전은 계산된 타이밍에 터진다.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예측하지 못한 크고 작은 전환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빈번한 잔혹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책을 놓지 못한다. 이는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설계된 플롯이 주는 지적 쾌감 덕분이다.

르메트르의 소설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냉혹한 응시다. 그의 인물들은 지독하리만치 정직하게 자신의 욕망과 폭력을 드러낸다. 『대문자 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폭력은 신념이 아니라, 자신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전쟁이 끝난 뒤 삶이 시시해졌다고 느끼는 인물들의 고백은 긴장과 강렬함을 잃어버린 일상의 공허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자극과 폭력을 향한 인간의 충동은 이 소설을 읽으며 쾌감을 느끼는 독자의 아이러니와 겹쳐진다. 우리는 잔혹함을 비판하면서도 그 전개에 몰입하고,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다음 장을 넘긴다. 이 불편한 동조의 순간 속에서 르메트르는 인간성의 이면과 본질을 자연스레 마주하게 만든다.

작품 속에서 ‘대문자 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소설 전반에 상징적으로 작용하는 뱀의 의미는 특히 인상적이다. “머릿속에 꿈틀거리는 뱀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환각을 넘어 기억의 파편이자 억압된 과거이며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뱀은 유혹과 지혜, 악과 재생이라는 상반된 상징을 동시에 지닌 존재인데, 이 소설에서 그것은 인간 내부의 어둠이자 왜곡된 사고와 기억의 형상으로 확장된다. 복수형으로 꿈틀대는 뱀들은 통제 불가능한 내면의 사자처럼 기능하며, 여기에 덧붙은 ‘대문자’라는 수식은 그 상징을 더욱 강조한다. 그것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의미로 확대된 기호이며, 한 개인의 광기를 넘어 인간 보편의 본성을 가리키는 표지처럼 읽힌다. 폭력과 기억, 욕망과 파멸이 이 상징 아래 응축되면서 제목은 단순히 눈길을 끄는 장치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의 중심축으로 자리한다.

『대문자 뱀』은 장르적 쾌감과 문학적 탐구가 맞물릴 때 얼마나 강렬한 에너지가 발생하는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 초기작은 시작점이면서 동시에 이미 완성된 세계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품은 주인공 마틸드는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 속을 떠돌 것이다. 장면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르메트르 소설이 지닌 시각적 힘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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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증정 @openbooks21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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