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게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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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쯤 지나, 먼 훗날의 사람들이 지금 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읽는다면 무엇을 느낄까. 등장인물의 대화와 표정, 그들이 머물던 방의 공기와 문장들에서 어떤 풍경을 떠올릴까. 우리는 사랑을 말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사랑을 둘러싼 불안과 결핍, 인정 욕구를 더 많이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나는 19세기 영국 소설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그 작품 속 사랑은 격정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인간 욕망의 날것을 거의 가리지 않고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읽은 『구원에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시대는 달라도 사랑은 여전히 어딘가 뒤틀려 있다. 어쩌면 사랑이란 처음부터 온전한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결핍을 지닌 존재들이 서로를 통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내 자리’라 믿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책 속 사랑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미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이미 덧씌워진 기대와 욕망 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나의 공허를 채워줄 미지의 영혼으로 세운다. 헌신과 배려, 이해라 부르는 행위들조차 결국은 나의 욕망과 맞닿아 있다. 아무런 이기 없이 누군가를 그토록 염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에게』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사랑이 남긴 상처와 균열, 차마 미화하지 못한 감정의 잔여들을 담담히 꺼내 놓는다.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말이라는 고백,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하며 닳아간다는 통찰, 기다리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는 이미 한 차례의 소진이 지나간 흔적이 배어 있다. 이 사랑은 구원이면서 동시에 상실이었다.

아마 10년 전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전혀 다른 감상을 적었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을 통해 나를 증명하고 싶었던 시절. 조금 망가지고 상처 입어도 다시 시작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믿던 시절. 그때라면 나는 이 문장들에 더 깊이 침잠했을 것이다. 우울한 젊음의 표상처럼 나의 사랑을 겹쳐 읽으며, 혼란을 낭만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묻게 된다. 왜 사랑은 온전히 행복으로만 남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분노하고, 실망하고, 그럼에도 쉽게 관계를 끊어내지 못했을까. 우리는 상대에게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어떤 기대가 사랑을 무겁게 만들었을까. 나를 끝까지 인정해 줄 타인의 시선을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시선은 애초에 한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을까.

이 책 속 사랑은 눈부시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써 내려간 태도는 아름답다. 자신이 만났던 누군가를 하나의 의미로 치환하는 일, 닳아 없어진 감정을 다시 문장으로 불러내는 일은 결코 가벼운 작업이 아니다. 쓰고 닳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있다면, 이 산문은 그 소진의 기록이다.

결국 『구원에게』는 사랑을 지나온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운명이라 믿었던 순간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며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닳은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남아, 결국 나를 이해하는 언어가 된다.

아름답지 않았던 사랑도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장을 통해 타인이 아닌, 그때의 자신을 마주한다. 사랑의 의미는 그 사람에게 있지 않고, 그것을 통과해온 나에게 있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비로소 그것은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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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증정 @bookrum.official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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