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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불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내가 이 위대한 작품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기억이라는 것이 파베세 자신에게 이토록 아름다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얻게 된다. 그의 문장은 건조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워, 기교를 덜어낸 정서 그 자체로 마음을 두드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기억이 오히려 상실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슬퍼지기도 한다. 기억은 우리를 지탱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더 이상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음을 증명한다. 붙들수록 선명해지고, 선명해질수록 멀어지는 것. 이 소설은 바로 그 아이러니 위에 서 있다.
이 작품에서 달과 불, 언덕과 흙, 포도밭 같은 자연의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들은 주인공의 기억을 불러내는 매개이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대신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대신,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풍경 묘사를 통해 자신의 기억에 충실한다. 그 결과 문장은 서정으로 스며들고, 은유는 과장되지 않은 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고향을 떠나 성공한 한 남자의 귀향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돌아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공간으로는 되돌아오지만, 시간 속의 자신에게는 결코 닿지 못한다. 마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고, 사람들은 남아 있지만 그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 달은 예전처럼 떠오르지만, 그 달을 바라보던 마음은 더 이상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
소설의 배경은 전쟁 이후의 북부 이탈리아 농촌으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균열이 깊이 스며든 공간이다. 사람들은 다시 밭을 일구고 계절은 어김없이 반복되지만, 그 일상 아래에는 쉽게 봉합되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전쟁 이후의 침묵, 말해지지 않은 상처, 서로 다른 관념이 겹쳐지지 못한 채 흩어져 있는 마을의 정적. 그 정적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깊은 목소리다. 파베세는 그 침묵을 설명하지 않고, 다만 인물들의 짧은 대화와 멈춰 선 시선, 달빛 아래 드리운 풍경 속에 스며들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거운 공기를 따라 서사보다 시간의 깊이를 체감하게 된다.
파베세 본인의 자전적 색채가 짙은 이 소설은 감정으로 치닫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달라진 풍경 속에서 우리는 그의 고향을 함께 걷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실제의 장소라기보다, 그 위에 덧씌워진 기억의 빛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빛은 이미 과거로 남아 다시는 손에 쥘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추억한다. 아마도 인간이란,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억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아름답기에 더욱 슬프다. 달은 여전히 떠 있고 누군가는 또다시 불을 지피겠지만, 지나간 자신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이토록 담담하고도 묵묵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을 오래도록 위대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소설 속 여성성에 대한 표현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시대적 배경과 작가 파베세가 지닌 여성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남성 화자의 시선 자체가 전후 농촌 남성성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 단순한 성적 편견이라기보다, 그 시대 남성 심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처럼 읽힌다. 그 불편함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이 소설의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 고전이 지닌 복합적인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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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구매한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