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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평점 :
경계가 아니라 연결을 서술하는 역사
— 찰스 킹, 『흑해: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은 기존의 고정된 육지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유동성의 ‘바다’를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복원한다. 『흑해: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는 경계가 아니라 연결의 공간을, 변방이 아닌 세계사가 교차해 온 흑해를 조명한다. 이 책에서 바다는 충돌의 무대이기 이전에 오랜 시간 사람과 물자, 언어와 신앙이 오가던 교류의 통로였다.
저자가 흑해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지역사를 넘어,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재구성되는 연결망이며, 선을 긋는 경계(boundary)가 아니라 여러 정체성이 겹치고 섞이는 변경(frontier)이다. 흑해 연안은 오랫동안 단일한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이 축적된 공간이었고, 그 복합성은 근대 이전까지 자연스러운 질서로 작동했다.
찰스 킹이 특히 날카롭게 해체하는 것은 ‘민족(nation)’이라는 개념이다. 현재의 민족 중심 역사 서술은 오래된 실체를 복원하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근대에 발명된 범주일 뿐이다. 민족이라는 틀은 복잡한 삶의 층위를 지워버리고, 하나의 이름 아래 수많은 목소리를 침묵시킨다. 흑해 연안의 역사에서 저자는 언어와 종교, 생활양식이 유동적으로 교차하던 시기를 통해 민족 이전의 세계가 결코 혼란이나 미개함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러한 혼종성과 개방성이 폭넓은 문화적 생성의 조건이었다.
이 책은 흑해의 약 2700년에 이르는 역사를 한 권에 담아내며, 흑해의 역사가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혼종성의 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대홍수 신화의 기억에서 시작해 고대 그리스 도시와 주변 민족의 공존, 실크로드의 해상 종착지로서의 역할, 오스만 제국의 내해로 기능하던 시기까지 흑해는 늘 섞이고 연결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남진과 근대 국가의 형성, 민족국가의 탄생은 이 유연한 공간을 점차 분할하고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강제 이주와 집단적 트라우마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결과였다.
찰스 킹은 이러한 역사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유럽과 아시아,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이 얼마나 취약한 개념인지 드러낸다. 실제 흑해 연안의 삶에서 언어는 뒤섞였고, 종교는 공존했으며, 정체성은 상황과 관계에 따라 변화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바다를 건넜고, 타자를 이해하며 다중 정체성 속에서 살아갔다.
이 책이 도달하는 결론은 근대 이후 민족과 국민국가가 이해의 진보가 아니라, 연결을 상실한 역사적 전환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민족 중심의 서사는 타자를 구분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애초에 섞여 있던 문화를 억지로 분리해 단일 정체성이라는 추상으로 환원한다. 국경의 고정은 이동과 공존의 기억을 지우고, 그 자리에 배타적 정체성과 자국 중심의 이해관계를 남겼다.
『흑해』의 2700년 역사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경계와 구분이 얼마나 최근의 산물이며, 동시에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보여준다. 이러한 통찰은 현재를 향한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이 책은 한 바다를 둘러싼 방대한 세계의 역사이자, 앞으로의 역사를 다시 만들어갈 하나의 가능성이다.
지금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연결되며, 마치 국경과 시대의 장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오히려 더 첨예한 대립과 자국 중심주의, 각자도생의 논리가 깊게 스며 있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고립되어 있고, 삶의 의미는 이전보다 더 불분명해졌다. 찰스 킹이 지적하듯, 역사는 거대한 이념이나 명확한 서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개인들의 이동, 우연한 만남, 느슨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 책은 그 연결의 역사를 되짚으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세계가 사실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음을 상기시킨다. 단절된 듯 보이는 지금 또한 과거와 같은 흐름 위에 놓여 있으며, 분열의 시대에 연결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의미는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연결을 상상하는 순간 비로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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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증정 @sakyejul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