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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나의 세계
마이클 톰프슨 지음, 심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1월
평점 :
우리는 매해 마지막 날 새로운 다짐을 한다.
다음 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사실에 어쩐지 마음 한편에서는 작은 설렘이 고개를 든다. 새해는 늘 어떤 새로움을 안겨줄 것 같고, 그동안 미뤄왔던 일을 시도해볼 도전의식을 품게 한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매해 새로운 기회가 도착한다. 기억되는 삶의 적립 속에서, 나만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인연 역시 시간을 따라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어떤 뇌과학 책에서는 사람이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주변 사람들’에서 찾는다.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기억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 속에서, 인간의 뇌는 일부 기억을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그 말을 떠올리니 가족과 친구처럼 삶을 함께 살아가며 나에 대한 기억을 나눠 갖는 존재들이 새삼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기억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지속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없는 나의 세계》의 주인공 토미는 그 ‘함께 기억해주는 세계’를 가질 수 없는 소년이다.
토미는 매년 자신의 생일이 되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부모도, 친구도,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조차 다음 날이면 토미를 처음 보는 낯선 존재로 대한다. 기억과 기록, 관계의 흔적까지 모두 지워진 세상에서 토미만이 어제를 기억한 채 홀로 남겨진다.
그는 매해 세상에 없었다가 갑자기 나타난 존재처럼 살아간다. 늘 처음 만나는 세상, 처음 맺는 관계, 처음 건네는 인사 속에서 삶을 다시 시작한다. 무엇보다 가장 슬픈 일은 소중했던 추억과 사랑이 오직 자신에게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토미가 품고 있는 기억은 공유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존재하고, 그 기억을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 반복되는 상실은 토미의 삶에서 가장 잔인한 규칙이 된다.
하지만 그는 기억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생일이 지나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될 것을 알면서도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낸다.
매번 같은 상실을 겪지만,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더 신중해지고, 더 용기 있게 선택하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려놓을지를 고민한다.
기억되지 않는 삶은 과연 무의미할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지 않는다면, 진심으로 살아낸 시간조차 사라지는 걸까.
토미의 삶은 함께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삶은 분명 가능하다고 증명해 보인다. 정체성이란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내는 것이라고.
토미의 삶에 대한 사랑과 선택은 깊은 감동을 전한다.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는 자신을 기억해주는 세계 대신, 자신을 잊지 않는 태도를 스스로 선택하며 성장해 나아간다.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삶.
매일의 선택이야말로 사라지지 않는 정체성의 가장 현실적인 증거임을 보여준다.
토미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성장을 내내 지켜보며 뭉클하고 안타까운 순간이 많았다. 동시에 토미의 의지와 사랑을 통해 삶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작가 모리아크는 말했다.
“내면에 암울한 비밀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이야기할 것이 없다.”
누구에게나 상실은 비극일 수 있지만, 삶의 선택은 감각으로 남는다. 토미는 자신의 비극을 넘어 매년 세상에 자신을 다시 심는다. 자신을 증명하는 과정 속에서, 삶은 여전히 많은 가능성을 품고 다가온다.
토미의 잊히는 삶으로 쌓아 올린 잊히지 않을 이야기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더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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