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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첫 직장을 다니던 때, 나에 대한 연민이 가장 짙었던 시절.
어른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가장 젊었지만, 마음만은 이미 닳아 있던 시기였다.
안산에서 학동까지 긴 전철 노선을 오가며 출퇴근을 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일로 받아들이며,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칸에서 나와 닮은 피로한 얼굴들을 마주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묻거나 다른 선택지를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그 무렵 나를 붙잡아주던 순간은, 전철이 동작을 지날 즈음 열리는 풍경이었다.
갑갑하고 어두운 회색이 걷히고, 한강의 물빛이 시야에 들어오는 그 찰나.
나는 생각했다. 이 복잡한 서울에서 긴장된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한강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멀리서도 한강의 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감정을 느슨하게 하고 쌓인 불만을 거둬갔다. 닫힌 열차 안에서 그 풍경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조금은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왜 강릉에 살며 바닷가의 산책을 찬미하는지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자연은 본래 그런 힘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앞에 시선과 몸을 잠시 내어놓는 것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위안이 찾아온다.
팬데믹 시기, 시대의 힘에 기대어 스스로를 더욱 고립된 생활로 몰아붙이던 때에도 내게 위안을 주던 풍경이 있었다. 내 방 창문 밖에는 제법 크고 높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는 그 나무 한 그루로 그날의 날씨를 알았고,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꼈다. 차를 마시며 나무를 오래 응시하는 시간은 매일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았고, 마음을 다듬고 또 하루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나무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마흔을 넘겨 화가로 살게 되면서 산책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나는 매일 산책의 호화로움을 누린다.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삶의 순간들은 더없이 소중해지고, 그것들은 어느새 풍부한 영감으로 옷을 갈아입고 그림이 되었다.
걷는 동안 삶의 크고 작은 문제를 대하는 나만의 속도를 알게 되었고, 계절마다 어김없이 색을 달리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나아갈 힘을 얻었다. 산책에서 만나는 것들은 이름이 없어도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경이롭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머리가 조금 복잡해질 때면 바로 산책을 나선다. 그러면 이내 머리가 맑아지고, 생각을 넘어선 어떤 명료함을 만나 선명해지는 삶을 본다. 그 풍경은 조금 흐리거나 어둡거나 서늘한 날에도 만족과 기쁨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산책길을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꽃과 동물을 만난다. 여러 시간의 바다를 만나고, 정고요 그녀도 만난다. 산책 친구가 생긴 것처럼, 이 정답고 고요한 마음의 산책은 자연에 대한 찬미이자 동시에 소란스러운 삶 속에서 선택해 마주할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자의 마음을 통해 자연과 이어지고, 산책길에서 자신을 깊이 만나는 기쁨의 시간을 누리기를 바란다.
“나는 산책하며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_쇠렌 키르케고르
“산책은 하루를 구원하고, 삶을 조용히 되돌려준다.”
_헤르만 헤세
“절망은 앉아서 깊어지고, 산책하며 견딜 수 있게 된다.”
_에밀 시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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