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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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사이 바움가트너, 그의 이름이다.
그는 모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사람이다. 큰 욕망 없이, 그러나 성실하게, 타인에게 가능한 한 친절하려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10년 전, 바닷가에서 아내가 사고로 사라진다. 40년을 함께 해온 사람을 잃는 일은 한순간이었고, 그 이후의 삶은 상실을 안은 채 계속된다.

다르고도 닮았던 두 사람은 모두 글쓰기를 사랑했다. 바움가트너에게 아내는 삶의 동반자이자 가장 친밀한 타자였다. 그녀가 사라졌을 때 곁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삶이 멈추지는 않았다.

노년기에 접어든 그의 일상은 단조롭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에서 기억은 뜻밖의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타버린 냄비에서 시작된 사소하고 무심한 장면들 속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여겼던 기억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 하필 지금일까. 어쩌면 그동안 기억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불러올 수 없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제서야 감당할 수 있게 되었기에, 기억은 다시 그에게 도착한다.

한 사람의 삶은 수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바움가트너와 그의 아내의 만남 또한 그러했다. 단 한 번의 우연이 아니라, 그 우연을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우연들. 만약 그 순간들이 어긋났다면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 우연은, 다른 어떤 삶의 가능성보다도 압도적인 의미를 지녔다. 아내와 함께한 생애는, 가질 수 없었을 수많은 삶의 가능성을 단번에 넘어설 만큼 충분히 가치 있었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바움가트너의 2년 남짓한 시간을 따라가지만, 그 안에는 그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다. 바움가트너 개인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부모와 형제, 아내의 삶까지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다.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연결은 오히려 한 사람의 생을 더 온전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많은 타인의 삶과 얽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우연의 층위에서 비로소 하나의 생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결말이다. 바움가트너의 끝은 또 하나의 시작처럼 열려 있다. 기억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서, 예기치 못한 우연은 다시 한 번 그를 삶의 다른 방향 앞에 세운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무언가를 건네며, 그는 그 앞에서 새로운 삶의 긴장을 느낀다.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 신은 늘 주사위 놀이를 한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연을 준비해 둔다. 『바움가트너』는 그가 평생 써온 우연과 기억, 허구와 상상력에 대한 사유가 가장 친절하고 애틋한 형태로 응축된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진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자리에서, 그는 삶이 여전히 연결 속에 있으며, 그 연결이 끝내 우리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삶이 가진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여러 선택지가 놓여 있고,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미래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바로 그 가능성과 불확실성이 삶을 의미 있게 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리에게도 당장 내일 삶을 송두리째 흔들 우연의 법칙이 작동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삶은 여전히 수많은 우연의 층위 위에 놓여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아직 완결되지 않은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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