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에서 깨다 -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정병호 지음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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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인 경험이 없는 일에는 감각이 둔해지기 마련이다.
역사적 사실을 교과서로 배운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식민의 시대를 겪지 않았고,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라는 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공공인류학이라는 말 역시 학문적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 때, 어떤 분노나 사명감보다는 다만 알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웠다.

역사 속 수많은 날짜와 사건, 숫자와 결과들 속에서 고통은 종종 추상화되고, 죽음은 통계로 환원된다. 우리는 그 위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를 살아간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어떤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 의미를 발견하기도 전에, 삶은 늘 바쁘고 현재는 쉽게 과거를 덮는다.

유골발굴은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지만, 곧 그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 책이 진짜로 다루는 것은 기억을 어떻게 현재로 불러올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에 가깝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 모든 일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가 아니라 대부분 민간의 손, 더 정확히 말하면 완벽하지 않은 개인들의 선택과 연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학생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에 왔다가 역사의 무게 앞에서 침묵하게 되는 장면, 한국 참가자들 역시 피해자의 위치에 안주한 채 상대를 단순화해왔음을 스스로 돌아보는 대목은 불편하지만 정직하다. 이 책은 가해와 피해라는 단순한 구도를 넘어, 역사에 연루된 인간들의 얼굴을 조명한다.

특히 유골을 “얼마나 발굴했는가”라는 숫자로 환원하는 위험성에 대한 저자의 성찰은 오래 남는다. 역사 기록을 넘어 윤리 영역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유골은 증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삶이었고, 봉환은 행정 절차가 아니라 존엄을 회복하는 행진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과거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우리가 어떤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과연 이 역사와 무관할까. 시대를 비켜간 이유만으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희생 위에 세워진 사회를 아무 의심 없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하나의 태도이자 선택은 아닐까. 우리의 침묵과 무관심이 얼마나 쉽게 역사를 다시 잠들게 만드는지 생각했다.

『긴 잠에서 깨다』는 결코 잊혀서는 안 될 것들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할 이유에 대한 기록이다. 기억은 자연적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붙잡지 않으면, 애도하지 않으면, 다시 불러내지 않으면 언제든 쉽게 가라앉는다. 그래서 기억은 역사이기 이전에 사명에 가깝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복해야 하는 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줘야 하는 책임이다.

역사적 진실과 기억은 박물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기념일에만 호출되어서도 안 되며, 우리가 매일 걷는 자리, 일상의 발밑에 놓여야 한다.

이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과거보다 현재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 역시 누군가의 이름 없는 삶 위에 놓여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역사를 의식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이 말하는 ‘긴 잠’은, 희생자들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 위에 우리 모두가 연루되었음을,
『긴 잠에서 깨다』는 독자 각자를 그 잠에서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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