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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충동
최윤정 지음 / 바람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주 멈췄다. 선 하나가 만들어내는 침묵 앞에서 자꾸 고개를 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의 충동』은 드로잉 에세이라는 형식을 빌려, 한 예술가의 삶을 가장 단순한 단위로 환원해보는 기록이다.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로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보여주는 솔직한 숙고다.
“I draw like other people bite their nails.”
― 파블로 피카소
(나는 사람들이 손톱을 물어뜯듯 그림을 그린다.)
파블로 피카소의 이 말은 ‘선의 충동’과 많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관통한다.
예술을 하나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되기까지 ‘선’은 결과가 아니라 불안과 생존의 습관처럼 작용한다.
생각을 설명하기보다 선으로, 하나의 회화로 표현한다는 것은 언어의 질서에서 벗어난 내적 감각을 응축해 전달하는 일이다.
그녀의 선은 결코 능숙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선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왜 아직도 불안한지를, 왜 여전히 망치고 있는지를 고백한다. 그 솔직함이 이 책을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잘 그려진 결과물 앞에서 안도하지만, 회화는 망칠 수밖에 없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삶이 살아 움직임을 증명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음’이 곧 작업의 본질이라는 인식은, 망치지 않으려 할수록 더 망친다는 고백과 잘 어울린다. 이 말은 삶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추상을 “방법을 모르고 해내야 하는 무엇”이라고 말하는 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이미 익힌 언어와 숙련된 사고로는 더 이상 건너갈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림이 머리를 통하지 않고 감정을 곧장 들추는 통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이 아름다운 것은 결국 실패한 직선들이 곡선을 닮아가고, 곡선 또한 단단해졌다는 깨달음에 있다.
삶은 어느 한쪽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늙음이 “고요의 수레를 타고” 온다는 문장은, 예술이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수용의 형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회화적 사유는 체념이 아니라, 살아남은 열정의 다른 이름처럼 읽힌다.
책을 덮고 나니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오래 그리고 싶다는 소망에 가까워진다. 선을 잘 긋는 일보다 선을 계속 긋는 일에 열정을 다하고 싶어진다.
『선의 충동』은 삶을 구원하는 예술이 아니라, 삶을 견딜 수 있는 밀도 높은 예술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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