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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평점 :
침묵하면서도 침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 클레어 키건. 그녀의 소설은 말해지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바로 그 침묵 속에서 가장 선명한 감정들이 드러난다.
클레어 키건은 196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키건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 개인의 이력만큼이나, 그 배경이 된 아일랜드를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었고, 1840년대 대기근 이후 가난한 농촌 사회가 지속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강한 규범과 전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삼키게 만들었고, 불행을 말하기보다는 삶을 견디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했다.
비극을 비극처럼 말하지 않는 이 절제된 정서는 키건의 문학적 토양이 되었고, 그녀의 인물들은 공동체의 압력 속에서 자신을 지우듯 조용히 존재하며,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반복해 증명한다.
『남극』의 서늘함은 감정이 얼어붙도록 오래 놓여 있었던 삶의 온도에서 비롯된다. 키건은 설명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독자를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짧고 예리하며 단단한 문장으로 인물들이 놓인 정서적 상태를 그대로 묘사한다. 그 절제는 차갑지만 잔인하지 않고, 침묵은 미화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하나의 상태가 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키건이 그려내는 여성성이다. 1990년대까지도 아일랜드 사회는 여성에게 순결과 헌신, 침묵과 희생을 요구했고, 여성의 성은 죄의 언어로만 정의되던 시대였다. 키건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 위에 놓인 여성들을 피해자의 위치에 고정하지 않는다. 그녀의 소설 속 여성들은 울부짖지 않으며, 저항하지도 않지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한 채 그 안에 머문다. 그 자체로 여성이 갖는 삶의 아름다움은 완전하다. 키건은 침묵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는 방식, 몸의 감각과 정서의 사소하고도 예리한 지점들을 관통하며 여성의 내면을 조용히 대변한다.
아일랜드의 날씨는 변덕스럽고 햇빛이 적으며, 비와 바람이 잦다. 이러한 자연은 키건의 소설 속에서 배경으로 작동하기보다 감정의 언어로 승화된다. 키건이 반복해서 불러오는 서늘함과 추위, 바람과 어둠, 축축한 공기의 감각은 인물들의 내면 상태와 정확히 맞물리며, 말해지지 않은 감정을 대신 드러낸다.
그래서 『남극』이라는 제목은 은유가 아니라 상태에 가깝다.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아직 살아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이미 혹독한 남극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감정이 얼어붙은 채 오래 견뎌온 삶의 남극처럼 읽힌다.
『남극』은 단편 하나하나를 따라가기보다, 하나의 자연처럼 읽히는 작품이다. 말보다 먼저 체온이 느껴지고, 설명보다 먼저 정서가 도달한다. 이 서늘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나라가 오랫동안 견뎌온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클레어 키건은 그 차가운 공기를 문학의 언어로 가장 정확하게 옮겨온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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