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연습 - 부서진 심장과 고통과 상처와 당신에 관한 에세이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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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마음의 상처에 대한 가벼운 에세이인줄 알았다. 막상 받아본 책은 두꺼운 두께, 민음사 고전에서나 볼 법한 편집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었다. 세상에나 심지어 쉬운 내용도 아니었다. 읽는 내내 이전에 읽었던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떠올리게 해 고통스러웠다. (후기를 보니 이 저자를 수잔손택을 잇는 에세이스트라고 평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작가 본인도 수잔 손택의 글을 여러번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작가로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길을 가던 중 무차별폭행으로 인해 외모에 흉이 생기기도 하는 등 남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든 경험을 많이 하였다고한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관점에서 인간의 고통과 상처와 공감이라는 감정에 대해 해석한 책이다. 그래서 절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러 번 읽으며 곱씹어보면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줄 것 같은 책이었다.


p.20 공감에는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질문도 많이 필요하다. 공감하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감이란 인간이 동물과 가장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라고 꼽는 요소이다. 어릴 때는 친구와 같은 감정을 나누고, 영화나 책을 보면 금새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였기 때문에 공감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며 서로 경험하는 바가 달라지고, 생활의 방식이 달라지고, 서로 다른 인생의 고비를 겪게 되면서 오히려 진정으로 공감하기가 어려워졌다. 타인의 고민을 들으면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겪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생각이 가득한 적도 있다. 


타인의 고통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본성이 무정하게 느껴져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우선 백지 상태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백지상태에서 타인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그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p.35 나는 멍해졌다. 정말 안됐군요, 라는 말을 내심 원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가 그 말을 해주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실망을 하게 되는 경우는 언제일까? 바로 내가 기대한대로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때이다. 


보통 타인과의 대화에서 화가 나거나 실망을 하게 되는 경우 또는 싸우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분노는 바로 내 기대대로의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내 말을 듣고 나를 위로해주길 바랬는데 나에게 잘못했다고 충고를 한다거나, 내 이야기를 듣고 도와주겠다고 해주길 바랬는데 힘들겠다는 이야기만 해서 짜증이 났던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기분이 상하지 않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바라고 대화를 시작하면 안되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바람을 명확하게 밝히는 태도가 필요하다.


p.44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그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 상상을 했다. 이것이 공감인지 아니면 도둑질인지 알 수 없었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타인의 죽음이나 불행을 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 내가 이런 일에 처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한번씩 해보곤 한다. 나는 이것을 공감 또는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저자의 의견이 충격적이었다. 타인의 불행을 도둑질해 자기연민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깊게 생각하고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문장이었다.


p.67 "이 안에 벌레가 있어요." 그리고 의사들과 간호사들 모두 나를 쳐다보던 것도 기억난다. 친절하지만 믿지 않는 눈빛으로. 그들의 의심은 공기 중의 습기 같았다. 그들은 최근에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 단절감은 그 벌레 자체보다 더 나쁘게 느껴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것이 없는 세계에 사는데 나 혼자만 이것이 있는 세계에 사는 기분이라니...p.71 지금 그녀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녀는 여기 와서 기쁘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좋아요, 하고 그녀가 말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다시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 저자는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였다고 이야기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모겔론스 병 환자들의 모임에 참여한 경험담이다. 모겔론스 병은 피부질환의 비공식명칭으로 실제 의학적으로 인정받는 병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이 병의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주로 정신병동으로 가서 심리적 치료를 받으라는 대답을 듣곤 했다고 한다. 결국 같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모이고 나서야 그들은 스스로가 미치지 않았으며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게 되었다.


예전에 독서모임에서 한 등장인물의 역할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이 등장인물이 주인공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주인공만이 특이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 이 세상에 나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새웠었다, 그런데 모임원 중 한 명이 '타인의 인생의 불행에서 내 행복을 찾는다니, 당신 인간성 최악인데요?'라는 반박을 내새워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타인과 내 인생의 공통점에서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자책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었다. 개성이 강조되고 자기주관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남들과 다른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세상에서 동떨어져 혼자가 된다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이것이 공감의 두 번째 걸음이 아닐까?


p.244  나는 그의 세계를 알아나가는 걸까, 아니면 관광객처럼 매점에서 쇼핑하면서 그저 그의 세계에서 기억할 만한 사항들을 열람하는 걸까?


그녀가 겪은 특이한 경험 중 또다른 한 가지는 바로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 받은 일이다. 울트라마라톤에 함께 선수로 참여하여 알게 되었던 사람이 죄를 지어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런 그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의 인생, 그의 감정, 그의 생각과 인생관에 대해 알아가던 저자는 문득 자신이 그를 이해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인지 아니면 교도소 수감생활이라는 그의 특이한 인생을 흥미로 즐기고 있는것이지 모호함에 빠지고 만다. 우리나라 tv프로그램을 보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만한 것이 많이 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인생을 그대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이것을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유용한 부분도 있지만, 어쩌면 나는 그들을 연민하는 나의 모습에 만족하는 것이 좋아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연민이고 어디까지가 흥미일까? 별 것 아닌 일에 왜 그렇게 어려운 고민을 하느냐는 반문이 들지 모르지만, 인생에서 한번쯤 내 행동, 내 생각의 진심이 무엇인지 고민해 봄으로써 좀 더 깊은 인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p.279 그들이 무죄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 때문에 나에게 그들은 성자여야 한다는 것을...p.287 그러나 나의 일부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즐겼음을 인정한다. 그 사태를 즐겼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동안의 나 자신을 즐겼다. 그것은 내가 공감의 성향을 지녔다는 증거를 제시해주었다.




책을 읽다보면 굳이 이렇게 어렵게 인생을 고민하면서 살아야하나, 라는 반문이 생길 정도로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감정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고민하는 부분들을 찾을 수 있다. 수잔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을때 느꼇던 것처럼, 감추고 있던 내 속의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듯한 수치심이 들기도 한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렇기에 읽을 가치가 있다. 예전에 <타인의 고통>을 읽을 때는 그저 반감이 들었다면, 이 책을 읽을 때는 어느정도 작가의 의견과 감정에 동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을 통해 인간의 '공감'에 대해 고민을 거듭할수록 인생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시야를 기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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