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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방 - 내가 사랑하는 그 색의 비밀 ㅣ 컬러 시리즈
폴 심프슨 지음, 박설영 옮김 / 윌북 / 2022년 10월
평점 :

어렸을 땐 색에 대한 호불호가 지금보다 강했던 것 같다. 가장 좋아했던 색은 푸른 계열이었고, 싫어했던 색은 갈색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색도 어우러져야 풍경이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부터는 모든 색이 다 좋다. 파란색이라고 해서 다 같은 파란색이 아니고, 붉은 색이라고 해서 다 같은 붉은 색이 아니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세가지 유형의 추상체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 뇌가 볼 수 있는 색의 조합은 100만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조차 새나 가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새는 대부분 사색형 색각자로 자외선을 볼 수 있는 광수용체를 추가로 가지고 있고, 나비는 최소 다섯개, 공작갯가재는 눈에 최대 16개의 센서가 달려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지만 이 동물들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색은 시각적 현상을 뛰어넘는다. 리처드 파인먼은 방정식을 볼 때면 글자가 색깔로 보인다고 했고, 셰프 타리아 카메리노는 색은 맛이라고 했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은 음악을 색채로 봤다. 소리와 맛, 글자, 언어에서 색을 본다는 건 어떤 걸까? 제임스 워너턴은 자신의 이름에서 토마토 통조림 맛이 강하게 난다고 했다는데 내 이름은 무슨 맛일까? 공감각 능력자는 대략 300명 중 한명 꼴이라는데 부럽기도 하고 너무 궁금하기도 하다.
'컬러의 방'에는 총 11개의 색이 담겨있다. 책의 옆면을 보면 색깔별로 해당 색과 관련된 이야기를 바로 찾아볼 수 있게 표시가 되어 있다. 싫어하는 색이 없다는 거지 좋아하는 색은 여전히 있기에 나는 가장 좋아하는 색부터 먼저 펼쳐봤다.
푸른색, 바다의 색이기도 하고, 하늘의 색이기도 하고, 보석의 색이기도 한 색이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색이기도 하다. 2015년 조사기관 유고프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파란색은 조사대상 10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색이라고 한다. 푸른색을 좋아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샐리 오거스틴은 그 이유를 과거 조상에게서 찾았다. 우리 조상에게 자연의 파란색이란 화창한 날의 하늘, 고요한 바다같은 좋은 날씨를 의미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고요함, 차분함, 평온함, 안정감과 푸른색을 연관짓는다고 한다.
인류가 맨 처음 사용한 색은 붉은 색이었다. 3만 5천년에서 1만 5천년 전 사이에 살던 인류는 알타미라 동굴 천장에 들소를 그렸다. 그림을 그리기에 원료는 당연히 지금보다 부족했을 것이고, 살아가는 환경도 열악했을 테니 생존하기도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벽화를 보면 그림을 그린 원주민은 디테일을 위해 깃털을 사용했고, 지워지지 않는 붉은 색을 쓰기 위해 적철석을 사용했다.
왜 하필 붉은색이었을까? 붉은 색이 상징하는 요소들을 떠올려보면 날고기, 피, 불이 떠오른다. 불은 인류의 생존에 무엇보다 필수적인 것이었고, 피가 없으면 죽으니 생명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인류의 생존에 무엇보다 필수적이었던 것들이 붉은색이었으니, 붉은 색에 끌리고 좋아하는 건 어쩌면 푸른색처럼 우리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푸른색, 그 다음에는 빨간색, 다음에는 초록색을 펼쳐봤는데 생각보다 내 색 취향은 꽤나 보편적이구나 싶었다. 초록색은 조사 기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아무리 적게 잡아도 파란색 다음으로 선호하거나 빨간색에 이어 세번째로 꼽히는 색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광합성으로 유지되고, 광합성의 대표적인 색이 엽록소의 초록색이니 우리는 태생적으로 초록색을 좋아하게 되어있다. 생각해보면 곰팡이도 초록색같긴 하지만 뭐 어쨌든 초록색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건 파릇파릇한 식물의 잎이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과거에 가장 선호하지 않았던 갈색. 윈스턴 처칠도 갈색에는 정말 마음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나는 파란색을 떠올리면 화창한 날의 푸른 하늘이나 한여름 해변가의 푸른 바다가 떠오른다. 초록색을 떠올리면 상큼한 향이 나는 율마 화분이 떠오르고, 붉은 색을 떠올리면 광택이 나는 붉은 실크 원단의 드레스가 떠오른다. 색에 대한 선호라는 건 결국 그 색을 떠올렸을 때 연관되는 물체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결정된다.
2010년 파머와 슐로스는 42명의 미국인에게 선호하는 색을 선택하게 하고 참가자들의 선택이 대체로 색과 연관된 물체의 선호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참가자들은 갈색을 썩은 음식, 진흙, 배설물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2012년 호주 정부는 금연을 장려하는 담뱃갑 디자인에 칙칙한 짙은 갈색을 썼고, 14세기 영국에서 하층계급은 법적으로 갈색 집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갈색이 그렇게 꺼려지고 불쾌한 색인가?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갈색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비온 뒤에 젖은 흙이 떠오른다. 비온 뒤에 젖은 흙과 나뭇잎의 냄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다. 반질반질한 갈색의 고급 구두를 떠올려보면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묵직하고 그윽한 멋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은 갈색이다.
붉은색부터 흰색까지 총 11개의 색에 얽힌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붉은색에 대한 선호가 큰 중국에서조차 대형 은행 일곱 군데가 브랜드 디자인에 파란색을 사용했다는 것도 의외였고, 김정은이 선전 사진에 백마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넣어 자기가 김일성의 후손이라는 걸 강조하려 했던 건지도 처음 알았다. 수백만 가지의 색들은 알게 모르게 색의 선호도와 색이 가진 의미에 따라 다양한 곳에서 의도를 갖고 쓰이고 있었다. 명확한 이름을 갖고 대표적으로 많이 불리는 11개의 색에 얽힌 뒷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윌북에서 무상으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