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세계문학 마음바다 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차병직 옮김 / 홍익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책과 달랐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사랑이야기에 그쳐 아쉽다는 평이 많았다. 이와 더불어 이 소설과 작가에 대해 조망의 폭이 커지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해,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나아가 그런 여자를 그렇게 사랑하는 본인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 그 지점에서 위대한의 가치가 다시 재평가할 수 있다고..

위대한 무가치한 존재를 무한히 사랑하고 그것의 실패를 받아들여,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성공을 거두기에, 역설적으로 위대하기에 불가피한 자조의 기운이 스며있다고..

데이즈는 보바리부인의 여성 캐릭터의 전형이고, 개츠비는 돈키호테의 남성 캐릭터의 전형이다. 이 둘이 공통분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이 시대에 왜 스콧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회자되는 걸까? 김영하 작가의 해석에서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의 현주소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연봉이 얼마고, 어느 회사에 다니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명품을 갖고 있는가 하는 삶의 본질, 자아의 명백한 정리와는 거리가 있는 허영이 어쩌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삶은 여전히 불안하기 짝이 없고, 불안에 떠는 자기 자신을 억지로 그러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덕지덕지 위장하는 것.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과 비교하고, 그래서 단순화 하면서도 꾸준히 스트레스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러면서도 현재의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언젠가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 당시의 배경인 1920년에는 미국의 불안한 성공이 있었다. 1차 대전의 종료 후, 대공황 사이의 그 불안한 성공. 이렇게 흥청망청 부에서 오는 르네상스를 즐겨도 되는가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이 시대적인 상황이 우리의 오늘과 비슷하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OCED 가입한 국가이면서도, IT강국이면서도, 올림픽이다 뭐다 하며 세계적인 이벤트들을 유치해내면서도 우리 사회에는 낮은 목소리들이 마치 터질 듯한 에너지가 쌓이고 있다. 비정규직, 취업난, 허술한 복지제도, 육아 문제 등등..

 

연초에 이어령 박사님이 TV에서 한 말이 기억이 난다. 20대는 소유의 욕망 보다는 존재의 욕망이 커야 하는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부모 세대를 보면서 소유의 욕망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 소유의 욕망을 채운다 한들 존재의 욕망이 있기 때문에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미성숙한 상태에서 30대를 맞이하고, 바쁘게만 흘러가는 현실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욕망에 대한 자기 정리를 하지 못한 채 40대를 맞이하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 메이킹이, 특히 회사라는 이미지 껍데기가 없어지는 시기에 혼란에 빠지고 개츠비처럼 허무하게 그리고 위대하게 시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나만의 해석과 생각에 공포가 느껴진다.

누군가의 러브스토리가 이렇게 켜켜이 쌓아놓은 비극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위대하고, 그 위대함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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