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을 읽고


오우, 이런 글도 있다니. 또 나를 놀라게 한다. 작가의 나이가 어리고 많든 간에 글을 잘 쓰는 것에는 상관이 없나보다. 세밀한 심리묘사에 인물묘사까지 대단하다. 인간의 내면 심리를 파헤친 듯 하다. 더군다나 신선한 감각으로 와 닿는 표현들이 남다르다. 문장 하나하나가 곱씹어볼만하다. 역시 배울 점이 많다. 책을 읽을 때 종종 느끼는 거지만 작품마다 배울 점이 늘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글을 늘 쓰지 않으면 새로운 표현도 문장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부단히 읽고 쓰는 가운데 이런 멋진 글이 나올 수 있으리라. 작가가 얘기 했듯이 인물을 먼저 설정을 하고 플롯을 짰다고 하는데 그래서 일까. 주로 인물 묘사가 많이 나온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행동을 다 잡아 냈을까 싶을 정도로 예리한 눈으로 관찰을 하듯 써내려간 것 같다. 비디오 보면서 묘사를 했을까. 상당히 예민한 관찰능력이다. 작가는 그래야 하는 것이리라.


고교생의 생동감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늘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혼자 있기를 즐겨하는 하츠. 그룹으로 다니고 무리져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비웃는 하츠. 외톨이는 웃을 때도 함부로 못 웃는다. 웃고 싶을 때 참아버릇 해서 배에 웃음근육이 생긴 하츠. 그런 하츠는 육상부원이다. 그래서 다리는 탄탄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우엉처럼.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행동하고 그런 거에 익숙한 여학생. 도시락도 혼자 먹는다. 그런 게 더 편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니나가와. 그 남자애는 한 연애인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다. 이른바 팬이다. 광적인 팬이다. 그리고 점심 시간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쉬는 시간에는 잠을 자는 니나가와. 하츠는 니나가와에게 관심을 돌린다. 그런 니나가와를 보면서 실제로 등짝을 발로 차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무시하고 혼자의 세계에 빠져 있는 그야말로 몰입해 있는 니나가와. 하츠는 키누요와 좀 친하다. 키누요도 다른 무리 속에 섞이고 싶어 한다. 하츠는 그나마 키누요 때문에 조금 숨통이 트이는 지도 모른다.


하츠의 관심은 온통 니나가와에 있는 것 같다. 좀처럼 학교에서는 아무내색도 안하는 니나가와. 무표정에 무관심, 의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다. 자기세계에 갇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고교생이 그래도 되는 걸까. 그 정도로 학생들이 혼자만? 지낸단 말인가. 충격이다. 모두 어울려서, 다함께, 더불어, 를 외치는데 정작 청소년들은 몸을 웅크리고 어두운 곳으로만 침잠해가고 있다.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 심리를 읽어간다. 겉으로 드러난 자아 말고 안으로 안으로만 말려들어간 자아는 어디 있을까. 웅크린 등짝을 펴주어야 하지 않을까. -너 거기서 뭐하는 거니? 어서 앞으로 가야지? 달려봐, 힘껏! 자, 어서! -누군가는 채찍을 들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작가는 만남 뒤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도무지 나올 것 같지 않던 곳에서 눈을 돌리게 하였다. 빛이 보였다.


이제 막 청소년기를 지낸 그래서 어른이 된, 그렇기 때문에 그 나이에 걸맞는 문제와 생각과 갈등과 고민을 제대로 표현해 낸 것 같다. 사강이 ‘슬픔이여 안녕’을 쓴 것도 꽤 어린 나이라고 들었다. 그 책도 참 인상 깊게 읽었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든 아니든 실감나게 표현한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생생한 보고 같은 글이다. 부러울 따름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청소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분명 나도 겪어온 과정인데 지나쳐온 길인데 알지 못했던 곳을 다시금 가보는 기분이 들었다. 세계란 무한하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어디로든 길은 열려있으니까 말이다. 청소년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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