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를 잡자 - 제4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18
임태희 지음 / 푸른책들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쥐를 잡자’를 읽고 - 임태희 지음, 푸른책들, 2007,

울면서 책을 읽기는 또 얼마만인가. 아주 오래전, 그건 소설책이었는데 겨울 나그네인가? 그 책을 읽다가 엉엉 운 적이 있다. 그리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도 그랬다. 그런 비슷한 책들을 보면 눈물을 쏟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 울게 만드는 책. 쥐를 잡자는 제목과는 달리 글은 아주 여리디 여린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예민하다. 문장들이 간결하다. 화려한 수식어도 없다. 몸에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는 모두 거둬낸 것처럼 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그래서일까. 글의 내용과 문체가 어울리는 것 같다. 꾸미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더 매력으로 다가온다. 맨 얼굴과 같은 글이다.소녀 같은 이미지.  

쥐란 일상적으로 보았을 때 어두운 곳, 침침한 곳에서 그야말로 숨어서 사는 동물이다. 꼭 잡아서 없애야만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힘없고 불쌍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쥐가 자란다. 여기 나오는 세 사람은 모두 다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것은 일종의 강박으로 다가온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우울이나 불안으로. 선생님은 사물함 속에 엄마는 냉장고 속에 아이는 뱃속에 각각 쥐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어두운 과거 캐묻고 싶지 않은 은밀한 비밀 같은 상처를 말하는 것 같다. 드러내야 하지만 잡아야 하지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는 꼭 잡아서 없애야 하는 어떤 것이다.

선생님은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문제를 만나면 회피하려고 한다. 문제가 있어도 그냥 지나쳐주었으면 한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엄마는 결벽증세를 보인다. 정작 깨끗해야할 냉장고는 쥐가 있다고 열어보지도 않은 채 오래도록 방치한다. 아이는 뱃속에 든 쥐,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텅 비어버렸으면 한다. 각각 쥐는 있다고 여기면서도 막상 확인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다만 사라져야 할 존재로 여길 뿐이다. 전체적으로 그 쥐 때문에 분위기는 우울하다. 마음이 어둡다. 누구하나 마음을 열고 속마음을 내보이지도 않는다. 속으로만 각자 앓고 있다. 생각 속에 갇혀 산다. 툭 터놓고 대화다운 대화가 없다. 건조하다. 답답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그 쥐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엄마가 스무 살에 만난 쥐. 기억을 거슬러 올라 쥐가 있다고 인정을 한다. 엄마에게 쥐는 자기 자신이며 세상이다. 어쩌면 받아주지 않은 사회와 현실을 비판하고 비난하며 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말도 안 되는 건, 절반의 책임이 있는 남학생은 지금 3학년에 올라가 입시준비에 한창이라는 거죠. 학교는 여학생을 퇴학시키고 일을 조용히 덮으려 했어요. 거기에 대해 아이들에게 어떠한 설명도 없었죠. 모두들 빤히 아는데도 쉬쉬하며 넘어갔어요. 당연히 성교육 같은 것도 없었고요.”  (p.85)

다섯 달 동안이나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은 것은 (쥐가 있다고 믿은 건) 그만큼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상태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겁이 나서 맞닥뜨리지 못하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한다. 용기가 없다. 시간을 끈다. 안으로 더욱 곪게 만든다. 그렇게 마음을 앓고 열어본 냉장고에는 쥐가 없었다. 엄마는 혼자 아이를 낳아 세상과 맞서 지내온 세월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딸이 수술을 한다고 하였을 때 말리지 않는다. 다만 17년 동안 죽음보다 더욱 가혹한 냉대와 외면으로 폭력을 가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딸아이는 또 자기 죄를 대신 쓰려 한다고 생각 할 뿐이다. 강하지 못한 엄마, 상처로 얼룩진 엄마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엄마. 엄마의 그런 마음은 엄마의 엄마로 이어진다. 업보처럼. 여기서는 상처도 대를 잇는다. 엄마의 조각 행위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는 것 같다.

“ 작은 사람이 시커먼 피로 범벅이 된 채 내 밑에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의사가 작은 사람의 다리를 한 손으로 들어 휴지통처럼 생긴 스테인리스 통에 넣었다. 멀리서 ‘퉁!’ 소리가 들렸다.”(p.102)
정말 마음 아프게 하는 대목이었다. 머리를 때리는 듯 강한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가. 낙태. 잔인함. 생명 있음. 그렇게 쉽게 죽이는 행위. 죄인이 되어 눈물이 나게 했다. 아이는 수술을 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상담도 받아보고 요양원도 생각해보지만 효과가 없다. 선생님은 뒤늦게 카페를 연다. 아이들은 많이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몰랐다.

“ 약속해요, 엄마. 나 없다고 울지 않기로.......”(p.121)
무슨 예감이 들어서인지 이 대목에서 눈물이 철철 났다. 아이는 시골로 갔다. 아이는 엄마와 할머니를 구원하기로 한다. 아이가 엄마에게 쓴 편지는 그야말로 눈물 바다였다.
“거친 세상일지언정 한 사람이 태어나 제 코로 숨을 쉬고 제 발로 걸어볼 기회를 빼앗은 죄. 얼마나 큰 죄인지......사지가 벌벌 떨립니다.” ( p.140 )  
아이가 수술 후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어머니가 살린 작은 사람 진주홍 이라는 말로 고마움을 전한다. 딸이 그렇게 가고 나서야 엄마는 비로소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 책은 그럼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세상에 대한 분노 상처가 낳은 것. 그 지독한 외로움. 세상과의 단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고통. 버림받음. 세상을 향한 혼자만의 소리 없는 절규. 무너져감. 그런데 또 그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상처. 엄마에서 할머니 그리고 아이에게로. 엄마는 제 상처에 갇혀서 17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낫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을 줘야 할 아이가 있는데도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엄마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고. 그 가운데 아이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생명의 태어남은 그토록 소중한 것인데 온 우주의 축복을 받아 마땅한 것인데(맨 끝부분 인용) 그렇지 못한 생. 결국 엄마나 할머니를 위해 또 한번의 희생을 치른다.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생명은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축복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함부로 생명을 다루지 말라는, 그리고 태어난 아이 한사람 한사람은 귀하고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 앞에서 우물쭈물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망설이는 그 사이에 누군가는 또 죽음의 강을 건너고 있을 지도 모를 일. 늦기 전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알고도 모르는 척. 묵인하는 것. 그런 것들은 정말 경계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려고도 않고 거리감과 경계심만 늘리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좀더 아이들과 거리를 좁혀야 할 것 같다. 여기 나오는 주홍이 같은 아이가 또 있으면 안 될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상담카페를 연 것은 좋은 방법이다. 쉬쉬 할 것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 너무나도 모든 것이 때에 늦다. 있을 때 잘해! 라고 말하고 싶다. 뒤늦은 후회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고 관심 가져주고 대화를 좀 많이 나누어야 겠다. ( 역시 또 실천이 중요하다. )  


< 2007,sj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