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대중이 스타의 탄생보다 좋아하는 건 스타의 몰락이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순결 판타지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피해자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한다.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다.
착한 피해자도 나쁜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불필요하다.

트집을 잡고 깎아내려
나쁜 피해자를 만들어내려는 욕망만큼이나,
그 반대 지점에서 착하고 선량하기만 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도 또한 불쾌하고 해롭다는 것이다.
그들이 옳고 그름을 논하며
피해자의 진짜 얼굴은 천사라고,
아니 악마라고 다투는 동안 정작 현실의 피해자는 유기된다.
다시 말하지만,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다.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희망이 없다, 운이 없다, 는 식의 말로
희망과 운을 하루하루 점치지 말라.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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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오늘도 나는 나와 다투고, 또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한다.
지치는 노릇이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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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꾸러기 사내아이 엄마들은
나처럼 고개 숙인 죄인으로 살지 않았다.
나만 그렇게 살았다.
내 스스로가 내 아들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너무 매몰돼
필요 이상으로 남을 의식하며 고개를 숙인 채 살았다.

장애인은 삶의 한순간에 짧게 스쳐 간
불쌍한 ‘타인’이 아니다.
언제고 내가 당할 수 있고
내 가족이 당할 수 있는 일을 먼저 겪고 있는
‘이웃’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예비 장애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장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아들은 병에 걸린 게 아니다.
신체가 아픈 것도, 정신이 아픈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 회로가 남들과 같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을 뿐이다.
아픈 사람이 아니라 느리게 커 나가는,
마음이 어린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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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장애 아이 육아보다 더 힘든 건 ‘세상의 시선’이다.
장애인을 향한 세상의 시선.
장애인 가족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것들은 차가웠고 고통스러웠다.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들은 스스로 친구를 선택하기 시작했고
엄마들끼리 친하면 그냥 엄마들끼리만 따로 만났다.

나와는 개인적으로 만나 차를 마시는 일은 있어도
반 친구들의 모임에 아들이 초대되는 일은 없었다.

반 친구들도 아들을 잘 챙겨주긴 했지만
친구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돌봐줘야 할 작은 동물처럼 대했다.
체육관으로 이동할 때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지만
딱지치기나 역할놀이를 할 때는 아들을 끼워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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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는 너를 영원히 오해하기로 했다
손민지 지음 / 봄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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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순간은
서로를 영원히 오해한 채로 남겨놓는 일이다.
더 이상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고
시간 속에 서로를 걸어 잠그고 빠져나와야 한다.

새로운 관계도 결국 낡아진다.

인간이 성장기를 거쳐
노화의 단계를 지나는 것처럼
모든 관계 또한 시간에 따라 모양새가 변하고,
거리가 느슨해지고, 얼룩이 생긴다.

그렇게 낡은 관계는
때로는 근사한 빈티지가 되지만,
자연스레 소멸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부모가 되어주는 것보다는
자식이 되어 더 보살핌받고 싶어졌을 때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고아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처럼
우리가 헤어지는 과정 또한 그랬다.
극적인 사건 따위는 없었다.

배신이나 거짓말, 누군가의 큰 잘못이 아닌
사소한 일들 때문이었다.
심지어 헤어진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저 상대방을 포기하는 일은
상대방과 맞춰나가는 것보다
여러모로 쉽고 간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언뜻 우리가 ‘어쩌다가’ 헤어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기억을 파고들면
그 시절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애썼는지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그때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도 소용없다.
아마 그 시절의 우리는 분명 최선을 다했을 터였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그 이상의 힘을 쏟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혼자서 뭐든 잘하는 독립적인 사람이지만
사랑을 시작하기만 하면 내 몫의 생활을 둘로 쪼개느라
늘 한 발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범위와 개입 정도를 찾지 못해
늘 무리해서 감정을 사용했다.
연락 횟수나 사소한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말 한마디에도 과하게 의미를 부여해 쉽게 서운해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과 사랑의 크기를 연관 지어
관계를 가늠하느라 늘 진을 뺐는데,
이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도는 상당했다.

한마디로 타인에 의해 감정이 쉽게 좌지우지되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어쩌다 위로가 필요한 날에도
괜히 연인에게 하소연했다가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위로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냐며 되레 화낼 일도 없다.
대신 내가 나를 위로해주면 된다.

내 감정의 작동 방식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기에
능숙하게 스스로를 달랠 수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동네를 산책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과자를 잔뜩 사 오면 행복하다.
나를 괴롭히는 상념에서 벗어나고 싶은 날에는
코믹 영화를 보고,
무기력한 날에는 달리기로 땀을 낸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이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했던 관계가 아니라
그냥 나빴던 관계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꾸만 나에게서 문제점을 찾게 되고,
상대방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 모습을 지우는 관계는
명백하게 나쁜 관계였다.
연인이라는 이름하에 존중 없이 행해지는 나쁜 말로
내 자존감이 다치는 상황을 스스로가 방관해서는 안 되었다.
나를 통제하려는 행동을 애정과 구분했어야 했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관계는 유지할 필요 없다고 알려주고 싶지만,
그 시절의 내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나 있을까.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배운다는 것이 잔인한 일이지만
나쁜 관계가 어떤 것인지 깨달은 것은
분명 나쁜 연애를 통해서였다.

스물의 나는 존중 없는 관계 속에서 힘들어했지만,
서른이 넘은 나는
하루 빨리 나쁜 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판단력과 용기쯤은 분명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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