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순간은 서로를 영원히 오해한 채로 남겨놓는 일이다. 더 이상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고 시간 속에 서로를 걸어 잠그고 빠져나와야 한다.
새로운 관계도 결국 낡아진다.
인간이 성장기를 거쳐 노화의 단계를 지나는 것처럼 모든 관계 또한 시간에 따라 모양새가 변하고, 거리가 느슨해지고, 얼룩이 생긴다.
그렇게 낡은 관계는 때로는 근사한 빈티지가 되지만, 자연스레 소멸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부모가 되어주는 것보다는 자식이 되어 더 보살핌받고 싶어졌을 때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고아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처럼 우리가 헤어지는 과정 또한 그랬다. 극적인 사건 따위는 없었다.
배신이나 거짓말, 누군가의 큰 잘못이 아닌 사소한 일들 때문이었다. 심지어 헤어진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저 상대방을 포기하는 일은 상대방과 맞춰나가는 것보다 여러모로 쉽고 간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언뜻 우리가 ‘어쩌다가’ 헤어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기억을 파고들면 그 시절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애썼는지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그때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도 소용없다. 아마 그 시절의 우리는 분명 최선을 다했을 터였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그 이상의 힘을 쏟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혼자서 뭐든 잘하는 독립적인 사람이지만 사랑을 시작하기만 하면 내 몫의 생활을 둘로 쪼개느라 늘 한 발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범위와 개입 정도를 찾지 못해 늘 무리해서 감정을 사용했다. 연락 횟수나 사소한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말 한마디에도 과하게 의미를 부여해 쉽게 서운해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과 사랑의 크기를 연관 지어 관계를 가늠하느라 늘 진을 뺐는데, 이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도는 상당했다.
한마디로 타인에 의해 감정이 쉽게 좌지우지되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어쩌다 위로가 필요한 날에도 괜히 연인에게 하소연했다가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위로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냐며 되레 화낼 일도 없다. 대신 내가 나를 위로해주면 된다.
내 감정의 작동 방식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기에 능숙하게 스스로를 달랠 수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동네를 산책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과자를 잔뜩 사 오면 행복하다. 나를 괴롭히는 상념에서 벗어나고 싶은 날에는 코믹 영화를 보고, 무기력한 날에는 달리기로 땀을 낸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이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했던 관계가 아니라 그냥 나빴던 관계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꾸만 나에게서 문제점을 찾게 되고, 상대방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 모습을 지우는 관계는 명백하게 나쁜 관계였다. 연인이라는 이름하에 존중 없이 행해지는 나쁜 말로 내 자존감이 다치는 상황을 스스로가 방관해서는 안 되었다. 나를 통제하려는 행동을 애정과 구분했어야 했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관계는 유지할 필요 없다고 알려주고 싶지만, 그 시절의 내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나 있을까.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배운다는 것이 잔인한 일이지만 나쁜 관계가 어떤 것인지 깨달은 것은 분명 나쁜 연애를 통해서였다.
스물의 나는 존중 없는 관계 속에서 힘들어했지만, 서른이 넘은 나는 하루 빨리 나쁜 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판단력과 용기쯤은 분명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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