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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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혹시 태즈메이니아族을 아는가?

 

 

태즈메이니아족은 絶滅된 인종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종종 절멸된 인종 모두의 상징으로 거론되곤 하였다. 태즈메이니아는 아일랜드 크기만한 섬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최초의 식민주의자들 - 죄수 24명, 병사 8명, 6명의 여성을 포함한 자원자 12명 - 은 1803년에 도착했다. 이듬해 최초의 원주민 대학살이 발생했다. '산적들', 즉  도주한 죄수들은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캥거루와 원주민들을 죽였다. 그들은 원주민 여자들을 데리고 갔다. 시신들은 개한테 던져주거나 산채로 불에 구웠다. 캐러츠라는 사람은 태즈메이니아인을 살해한 일로 유명해졌다. 그는 태즈메이니아인을 살해한 다음 그 부인에게 남편의 머리를 목에 걸고 다니도록 윽박질렀다. 원주민들은 인간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야수들'이거나 난폭한 짐승들이었다(p.187)

 

 

위 인용문은 Sven Lindqvist라는 스웨덴의 진보적 저널리스트가 1996년에 저술한 <Exterminate All the Brutes>라는 책의 우리말 번역본인 <야만의 역사, 2003>에서 발췌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 때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현대 Hynix 반도체 내에서 청강문화산업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직원들을 대상으로 독해와 영작문을 가르치던 2004년 초였다. 당시 점심을 먹고 다음 수업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서 한 번 Hynix 영내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직원용 복지관에 딸려 있던 서점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발견하고는 그야말로 경악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니까 당시 아직은 Genocide나 Holocaust 등의, 이른바 대량학살에 관한 체계적 독서가 부족했던 때, 이 책은 첫 페이지를 펼치고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넘어가지 못했을 정도로 너무도 광기어린 학살의 모습에 전율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나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이라크의 쿠르드족 학살, 일본의 난징대학살, 남한의 제주 4.3 학살 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게 되었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같은 인간에 의한 광기의 희생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절망에 공감하면서 그들과 연대의식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원주민' 또는 학살자들 표현대로 하면 '야수'들의 죽음이 곧 내 피붙이의 죽음이고, 내 민족의 멸족이며 그로 인한 정신심리적 외상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치유될 수 없는 큰 상처로 남게 된다는 것도 내 몸의 아픔으로 실감했다. 이 책에 기록된 학살은 물론 백인들에 의한 것이고, 학살의 대상은 백인들이 야수라 불렀던 아프리카인들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그리고 북미 원주 인디언들과 남미의 인디오들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은 무슨 근거로 이들을 야수라 불렀고 자의적으로 지상에서 절멸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바로 생물학. 정확히 말하면 사이비 과학의 일종인 骨相學과 Charles Darwin의 <진화론>에서 이른바 자연선택과 생존경쟁 이론, 특히 適者生存을 과대해석한 Social Darwinism으로 왜곡한 인간의 우열 나누기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적 근거(백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합리적이었을)를 등에 업고 유럽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륙에서 행해졌던 대량학살의 광풍은, 소위 학살의 심성과 결합하여 수많은 목숨들을 강제로 박탈했다. 이것은 지구상에 백인들만 살 가치가 있는 인종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아무리 사이비 과학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해도, 원주민들을 절멸해서라도 빼앗고 싶었던 그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점점 불어나는 우수 인종(?) 백인들의 생존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절박한 요구때문이었을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본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할 생각을 했던 것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을까? 유럽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유럽사에서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도덕적 책임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사실은 유럽인의 정신 속 어딘가에 학살에 대한 심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유대인 대학살은 이미 오래전부터 행해져 온 학살의 연장선 위에서 현대에 '재현'된 최종 형태는 아닐까? 만약 일본인들이 韓민족 전체의 말살을 목표로 실행에 옮겼다면? 현재 북미에 남아 있는 인디언의 숫자는 95%가 절멸되고 난 뒤의 한 줌에 불과한 비극의 증인이라면? 과연 흑인은 야수인가? 그러면 백인은 문명인인가? 문명의 어떤 면이 대량학살을 합리화해주는가? 사실은 백인이 야수는 아닌가? 자신 속의 야수성은 교묘히 감추고 타자를 야수화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이 문명과 종교를 자랑하는 백인의 참 모습인가? 경계해야 할것은 정작 인간 심성 속의 절대 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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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다케나카 치하루 지음, 노재명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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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를 알라딘 종로에서 보았을 때, 책의 제명보다 표지 사진이 먼저 가슴을 후벼 파는 경험을 했다. 눈물을 흘리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흑인 소년의 얼굴. 어쩌면 내전 지역의 소년병으로써 같은 또래의 敵을 사살하고 난 뒤의 참회의 눈물일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눈 앞에서 학살당하는 가족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회한의 눈물일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전쟁을 벌여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국가를 파산 상태로 몰아간 소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 또는 무기와 돈을 지원하여 지역에서의 패권을 노리는 서구 강대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눈물일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보는 사람의 세계 인식 여하에 따라 달라질수밖에 없겠지만, 사진 한 장이 전달하는 이토록 많은 상념이라니... 이 책 <세계는 왜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는 일본의 정치학자인 다케나카 치하루(竹中千春)가 쓴 책으로, 한국어 번역 문체로 미루어 보건데 일본의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작인 듯싶다. 하지만, 전후 과도한 평화에 빠져 자국 이외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일본과 그 일본에서 살아가는 중고등학생들의 세계 인식에 커다란 도움을 줄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전쟁과 평화, 폭력과 테러리즘 등, 현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 개념에 대한 사고 자체를 등한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우선 세계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와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 나누어 대개 전쟁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일어나며 그 전쟁을 지원하여 대리전을 치루도록 획책하는 서구 선진국의 이기적인 발상에 일침을 가하는 저자의 펜 끝이 날카롭다. 특히 전쟁을 기획하는 폭력집단들 중에서 군대나 경찰, 반정부무장조직, 또는 국제테러조직 등에 대한 개별적 설명 뒤에 이어지는 폭력의 여섯가지 요소에 대한 필자의 논의는 전쟁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그 여섯가지 요소는 신념, 사람, 무기, 자금, 정보, 네트워크로 요약되는데, 특히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는 이러한 폭력의 요소들이 너무도 쉽게 제 기능(?)을 발휘하여 국지전 또는 내전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이 책의 제 3장 <분쟁의 최전선을 가다>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본질에 대한 역사 정치적 접근,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의 미국의 중동 지배에 대한 더러운 야심,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얽힌 미국과 소련의 이념 대립과 미국의 배신 등, 기존에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재확인하며 새삼 국제정치의 비열함에서 인간성의 끝을 보았다. 결국 전쟁은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끝내 그들의 목숨을 빼앗고 삶의 근거지를 철저히 파괴하는 극한의 폭력일 뿐이다. 이러한 전쟁의 본질은 결국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이기적 발상에 의해 더욱 방치되고 있다는 것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 책 뒤 표지의 글을 옮겨 보겠다. "...현재 전 세계 난민과 이재민 약 3900만 명! 무력분쟁 사망자의 90% 이상이 일반시민. 그 중 80% 이상이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여성과 어린이! 전 세계적으로 매설된 소형지뢰의 수 2억개 이상! 매달 800명의 어린이가 지회를 밟고 죽거나 발목 등 신체 일부가 절단되고 있으며, 시에라리온의 경우 반군의 80%가 10세 미만 소년병! 2002~2006년에만 전 세계 어린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2개 국가 약 15억 명의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강도 높은 분쟁 상황에 휘말림!" 어떤가? 만약 현재 고등학교 2학년생인 내 아들이 총을 쥐고 또래 적들을 죽이며 살육과 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만약 느닷없이 터지는 지뢰에 목숨을 잃거나 신체불구자가 된다면? 과연 한국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인가? 한국은 얼마나 국제적 분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한국의 국제 분쟁 보도는 얼마나 객관적인가? 혹시 서구 강대국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어차피 우리와는 별 관계없는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신경 쓸 것 없이 내 일신만 편하면 된다고 치부하며 소시민의 안락함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 쓰고 있는가? 도대체 폭력의 연쇄고리를 끊을 해결책은 있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제 5장에서 몇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단시간에 효과를 보기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분쟁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무기와 전투원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인지?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서구 선진국과 러시아, 중국, 최근엔 한국까지, 전 세계 무기 수출의 흐름이 바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갈림길 아닌가? 무기 산업과 국제 분쟁의 조장, 이 두 가지는 세계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해결책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필자의 주장처럼 간디의 비폭력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비폭력 정신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인류애로 확대할 수 있는 정신적 각성을 주고,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폭력에만 의존하려는 황폐해진 정신의 늪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평화로 나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강화하는 데 절대 필요하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과 계몽을 통해 장기적으로 접근한다면 언젠가는 지구상에서 전쟁이나 폭력은 사라지고 돈독한 인류애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글 자체가 어렵지 않고 차근 차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는 점이 미덕인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세계관 내지 세계 인식의 폭을 넓히고 수정하여 진정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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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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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이라니? 참, 엽기적인 책 제목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영어판의 제목도 <Delightful Murder: A Social History of the Crime Story, 1984>이니까 직역이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Ernest Mandel(1923~1995)의 약력을 살펴보니 트로츠키 주의자 또는 맑스주의 경제학자로 소개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추리소설의 역사를 썼다고?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같지만, 저자의 머리말을 읽어보면 대단히 타당한 논리에 수긍하게 된다. ".....모든 대륙의 수십 개 나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범죄소설을 읽는다.....이런 상품이 충족시켜주는 욕구들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이 욕구들은 어떻게 변해 왔고 부르주아 사회의 일반 구조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나의 접근법은 헤겔과 맑스가 개진했던 전통적인 변증법이다.....맑스주의자가 범죄소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변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유물론은 모든 사회 현상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어떤 연구라도 본성상 다른 연구보다 가치가 덜한 것은 없다."(p.9~12) 그래서일까, 부제처럼 이 책은 범죄소설(또는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을 사회적 맥락에서 일종의 계급투쟁이나 사회적 서열간의 갈등, 부르즈아의 안락한 거실에 앉아 자신은 살해당할 염려없이 유쾌한 기분으로 소비되는 고급 오락물로 분석한다. 마치 현대의 관객들이 자신은 살해당할 염려없는 어두운 극장에 앉아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이 잔혹한 살인자에게 한 명씩 처절하게 죽어나가는 장면을 보며 환호하듯, 범죄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의 쾌락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경우를 곰곰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시절에 처음 추리소설을 읽게 되었던 계기는 아마도 탐정의 초인적인 추리력에 반해서라기 보다는 어린이 특유의 잔인함으로 살해장면 자체에 재미를 느껴서 였을 것이다.(초등학생 시절 당시 계림문고에서 어린이용으로 재편집된 셜록 홈즈 시리즈와 괴도 뤼팽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 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권 <A Study in Scarlet>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살인 사건과 추리 과정을 다루고 있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이지만, 작가인 Arthur Conan Doyle의 편향적인 시각도 곳곳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 당시의 제국주의 영국을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도를 포함한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적 자원과 값싼 노동력으로 지탱되던 富가 없었더라면 과연 영국에서 범죄소설이 창안될 수 있었을지, 내가 알기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극히 가난한 국가에서는 범죄소설이 쓰여진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도, 범죄소설은 분명히 사회적 맥락에서 경제와 자본, 또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치적 소외에 따른 불만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 작가들에 의해 쓰여진 장르라는 점에서 단순히 오락거리라 하기에는 꽤 깊은 울림이 들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소위 고전 추리소설에 속하는 것들로, 요즘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에 비해 분명 사회적인 계급성, 그러니까 저자에 따르면 "고전 추리소설의 유명한 주인공들 대부분은 상류계급 출신이라는 것을 지적"(p.58)하고 나서 읽어야 하는 일종의 제약이 있기는 하다. 따라서 "맑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 당연히 이런 추리소설들 대부분은 부르주아의 애호물이지, 실제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자본가들의 애호물은 아닌 것이다."(p.59) 그러므로 고전 추리소설의 대부분에서 살인자들은 당연히 부르주아가 아닌 하류계급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범죄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쩌면 단순히 인간의 어두운 심성과 살인 자체가 주는 엽기성에 대한 병적 호기심의 해소를 통해 자신이 속해있는 시공간에서 자신의 육체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첫 동기가 무엇이든 범죄소설을 읽는 것은 소위 순수문학이 주지 못하는 인간의 극히 어두운 심연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그것에 대한 확인을 통해 자신에게도 내재되어 있을 그 심성과 마주 대할 용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도 또 하나의 정신적 발전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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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볼프강 벤츠 지음, 윤용선 옮김 / 푸른역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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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낯설어 보일 때가 있는가? 분명 자신의 얼굴임에도 어딘가 왜곡되어 보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눈이 보는 실재의 像과 마음이 만들어낸 상이 일치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인간은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내가 부여하고 싶은 데로의 상을 만들어 그 상을 고정시키고는 상대방이 그 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고자 하는 경우에 이 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논의를 확대해 보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할 때 조선인의 성격이나 습성을 철저히 파헤쳐 조선의 영구지배를 획책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가능한 부정적이고 건설적이지 못한 것만 모아 끝없이 조선인들에게 주입한 결과 조선인들 스스로도 나태하고 발전 가능성이 없는 저열한 민족으로 격하했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의도대로 식민 통치가 계속 될 수 있었다. 영국이 인도를 200년간이나 식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끊임없이 주입시켰던 인도의 부정적 이미지 덕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문명국(이라 주장하는)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갔던 것이다. 마치 학습 능력이 조금 뒤떨어지는 아이에게 계속해서 "너는 머리가 나쁘니까 공부해봐야 소용없어."라고 끝없이 부정적인 말을 한다면 그나마 있던 관심마저 빼앗아 정말 공부와 담는 쌓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듯, 누구에게나 있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그것이 전부인것처럼 과장하고 부풀리는 행위는 이미 정치적 박해의 일종으로 볼 수밖에 없다. 특히 그 대상이 유대인 같은 민족 단위일 때는 겉잡을 수 없는 폭력을 조장하고 한 민족 전체의 절멸까지 거리낌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유대인야말로 왜곡된이미지로 인해 너무도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온 민족이 아니던가. 고리대금업자, 수전노, 매부리코, 안짱다리 등, 유럽에서 만들어진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은, 결국 이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신의 부정적 욕망과의 상충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겹쳐지며 확고한 위치를 잡아 나가는 것이다. 1차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내부의 철저한 반성 보다는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들의 획책 때문이었다고 외부로 화살을 돌렸을 때 이미 유대인 대학살은 독일인들의 마음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오랜 세월동안 쌓여 온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마치 전쟁상황에서 적의 이미지를 가능한 부정적으로 주입하여 적개심을 강화 하듯이, 정설처럼 수용되어 결코 바뀔 수 없는 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섬뜩했던 부분은 소위 지식인이나 예술가들 처럼, 인간의 심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리라 여겨지는 사람들까지도 예외없이 유대인 비하나 박해에 앞장 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 더욱 더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결국 자신 속에 있는 부정적 이미지들을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극단적인 과장을 함으로써 이익을 보고자 하는 인간의 사악한 심성이 제거되지 않는 한 유사한 일들은 계속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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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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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래 "'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p.12)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책 뒤에 내가 적어 놓은 독서후기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도대체 인간은 언제쯤이나 진정한 평등과 평화를 이룰것인가? 그 때가 오기는 할 것인가? 여전히 저개발과 기아, 가난, 종교 및 민족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인간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2008.7.6(日) 완독" 

 

이 책을 읽었던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만과 일본, 일본과 한국간의 영토분쟁이나 어업분쟁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역사 왜곡 역시 도를 넘었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종족 간 내전이 끊이지 않고 러시아나 독일의 인종차별 역시 우려의 단계를 넘어섰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정부와 권력기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희생되는 민간인들의 숫자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유대인이 유럽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추방되기 시작했던 14세기 이후, 크고 작은 전쟁이나 내전으로 인해 계속 발생하고 있는 난민들은 결국 제 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떠돌거나 남은 生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즉, 국가경영의 의무를 게을리하고 오직 권력유지에만 골몰한 탓에 정작 백성들은 굶주림과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 조국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일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씨는 재일조선인 2세다. 그 역시 디아스포라의 숙명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 뿌리 뽑힌 자로 살아 온 한국근현대사의 비극적 구현체인 셈이다. 일본제국주의와 소수 매국노의 밀약으로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조국을 떠나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지로 떠돌며 스산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가. 조국에서도 버림받은 이들이 다른 곳에서 환영을 받았을리가 없지 않은가? 러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역시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국권을 강탈당한 조국의 무능함으로 인해 생겨난 디아스포라들이 아닌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소수 권력자와 그 아래에서 이권을 챙기는데 골몰하고 있는 하수인들만의 이기적 행태가 계속될 때 디아스포라가 생겨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남북의 이산가족 역시 예외가 아니다. 결국 디아스포라는 일차적으로 한 국가의 정치적 무능함과 무관심에서 생겨나고, 근대 제국주의 처럼 타국을 침략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심성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에 대한 평균적 한국인들의 폭압적인 시선이나 과거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자행했던 정치적 박해가 무엇이 다른가? 어쩌면 인간은 나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타인과 그 집단에 대한 태생적 거부감과 멸시, 그로 인한 폭력과 추방 또는 집단학살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렇게 강제로 뿌리 뽑힌 자들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지경에 이른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서로를 증오하고 그 증오가 정치적 무능함 또는 왜곡된 시선과 결합될 때마다 세계 각지에서는 계속해서 디아스포라들이 생겨날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결국 인간 심성이 만들어낸 편견과 증오의 산물이니까. 언제쯤 참다운 평화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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