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자서전 (개정판) -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의 삶 - 체 게바라 전집 1, 개정판
체 게바라 지음, 박지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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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체 게바라를 언급하는가? 표면적으로 동서 이념 대립은 끝났지만 미국이 주창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 자본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하며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노동의 신성함을 짓밟고 있는 이 시대에? 어쩌면 그래서 더욱 체 게바라라는 인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 체 게바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반미를 외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소수의 계승자들에게는 비록 체 게바라의 육체는 소멸했어도 그 혁명정신 만큼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들 속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엄연한 실체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체 게바라의 혁명은 볼리비아에서 종말을 고했지만, 그의 정신과 행동력, 민중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삶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혁명동지인 피델 카스트로는 물론이고 함께 남미를 여행하며 민중의식에 눈 뜬 의사이자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 남미의 대표적 시인인 빅토르 카시우스 등의 걸출한 인물들 외에, 서구의 식민지였던 제 3세계 국가들의 젊은이들과 식민지 경험을 극복하려 안감힘 쓰고 있는 한국인에 이르기까지, 아마 20세기에 자유와 평등을 꿈꾸던 사람치고 체 게바라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쿠바 혁명의 성공과 볼리비아에서의 비극적 죽음은,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안락함과 물질적 富, 개인적 행복 따위의 세속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그것도 자발적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민중과 호흡하며 민중을 위해 정신과 육체 모두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의사로써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그 모든 명예와 세속적 성공을 벗어 던지고 혁명가로써, 때로는 시인으로써, 자상한 아버지로써, 그렇게 살다가 불꽃처럼 꺼져 버린 체 게바라의 삶은, 글로도, 사진으로도, 영화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순도 100%의 완벽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육박해온다. 그의 삶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란 邪的 욕망에 사로잡혀 얼마나 쉽게 일을 그르치는가? 체 게바라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민중의 해방을 위해 헌신했다. 과연 인간이란 이기적이고 나약하며 자기보존에만 힘쓰는 동물이란 말이냐? 체 게바라는 이타적이고 강인했으며 타인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과연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바라는 마음이 없었을까? 그러나 가족과 함께 즐겁고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세속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더 절실한 대의를 위해 오직 한 길로만 가기로 결심했을 때, 나를 포함하여 체 게바라 이후에 살게 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의 깨어지지 않을 상징으로써 체 게바라에 열광하고 그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닮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서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잊어 버리자. 오직 그가 품었던 민중에 대한 사랑과 혁명정신만을 기억하자. 그리고 조금씩 邪慾을 줄여 나가자. 그러면 언젠가는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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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지성인 - 개정판
에드워드W.사이드 지음, 전신욱.서봉섭 옮김 / 창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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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W.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과 동의어라 할 만큼 서양의 동양 지배담론으로써의 오리엔탈리즘을 널리 알린 학문적 업적만으로도 언제까지나 기억될 지성인의 대표적 이름이다([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리뷰는 빠른 시일 내에 올리도록 하겠다. 처음 읽었던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데다 현재 강의준비의 일환으로 三讀중이다). 이 책은 그가 1993년에 영국 BBC의 Reith Lectures에서 행한 여섯 번의 강좌를 묶은 것이다. 원제는 [Representation of the Intellectual]인데, 역자들은 본문 내의 문맥에 따라 재현, 표현, 표상, 대변 등으로 적절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책 전체를 꿰뚫고 있는 사이드의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용어는 代辯인듯 싶다(기회가 되는 데로 영어판을 구해 다시 읽을 것이다). 아무튼 첫 번째 강좌에서 사이드가 인용하고 있는 쥘리앙 방다의 정의에 따르면 ".....진정한 지성인들은 정의와 진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열정과 이해관계를 초월한 원칙들에 의해 움직이면서, 부패를 비난하고, 약자를 옹호하고, 불완전하고 억압적인 권위에 도전할 때에 바로 지성인 그 자신들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p.36~7) 또, 사이드 자신은 "나에게 있어 핵심적 사실은 지성인이 일반대중을 위해서는 물론, 일반대중을 향해 메세지, 관점, 태도, 철학, 여론을 재현하고, 구체화하고, 표명하는 재능을 부여받은 개인으로서 생각한다."(p.44)고 전제한 뒤, "나는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청중이나 주민에게 나의 관심 사항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관심 사항의 단순한 제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표명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인 동시에, 자유와 정의에 대한 대의명분을 발전시키려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스스로 무엇을 표상해야 하는 가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p.44~5)라고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서 좀더 구체성을 띄게 된다. 그러니까 지성인은 인간 사회에 대해 말을 하는 개인인 동시에, 그 말을 통해 평균적인 대중에게 현실을 여하히 재현하여 환기시킬 것인가에 열정을 쏟는 사람인 것이다. 대중의 세계 인식이란 얕고 천박한 것이어서 유행이 끝나면 금새 잊혀지고 또 따른 유행에 몰리는 습성을 갖고 있는지라, 예를 들어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이집트와 리비아, 시리아 등에서의 민주화 열망에 대한 정치적 관심 또는 내전 지역에서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대한 분노 보다는 당장 나의 감각적 쾌락과 주식시세의 등락 따위에 골몰하는 바, 이들에게 올바른 세계 인식과 해석의 능력을 부여하여 하나의 주체적인 인간으로써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여론에 속지 않으며 진정한 평등을 지향하도록 이끄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려면 지성인 자신이 먼저 철저한 세계 인식과 도덕성, 그리고 권력에 대해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사적인 사건이나 한국 역사를 보더라도 부패한 권력이나 억압적인 정치체제에 맞서 마땅히 할 말을 하고 대중들을 이끌어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했던 지성인들이 있었다. 이렇게 공적역할을 수행하는 지성인의 도덕성은, 인간의 자유와 지식을 신장시켜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지식의 확대로 이어지는 일련 과정의 첫 번째 요소로써,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당연한' 가치들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와 대안의 제시로 이어진다. 즉, 지성인은 거대권력의 파괴적 속성을 직시하고 그 안에 뛰어 들어가 대중에게 그것의 실체를 폭로하는 데 주저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성인이란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정치적,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에 저항하고 진정한 시민적 자주성과 자유를 회복하는데 필요한 실천 이론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성인이 자신의 국민들의 집단적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고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p.88)라고 할 때, 이러한 정의에 들어 맞는 지성인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단순한 지식인이었거나, 권력에 타협하여 일신의 안락함으로 복귀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러면 위와 같은 의무를 행하며 끝내 굽히지 않았던 지성인들이 한국 현대사에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함석헌이나 윤이상, 김수영 정도가 이에 해당할 것이라 믿는다. 이들이야 말로 한국 현대사의 고통을 재현하고 그를 통해 고통의 기억을 영속화해오지 않았던가?

 

지식이 권력을 위해 봉사하고 지성인이 권력 속에 안주 할 때, 그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 퇴보의 큰 원인이 된다. 지성인의 역할은 논쟁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유지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고 권력을 대변하는 타락한 모습은 지성인을 지향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에드워드 W. 사이드가 진정한 지성인으로 불리우는 것은 곧 그가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니고 있었고 실제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해 왔기 때문이다. 그를 닮고 싶다.  

추기: 번역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이 책이 정식 저작권을 득한 것인지 의심스럽고, 번역자들의 약력이 정확하다면 번역의 질이 매우 낮은 편이다. 영어판을 접해보질 못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꽤 여러군데 뜻이 통하지 않고 문맥 자체가 이해않가는 부분도 많다. 편집자의 실수인지 띄어쓰기도 엉망이고 전체적으로 부실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원저자의 명성에 누가 되는 부실한 번역본은 책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커녕 반드시 읽어야 할 당위성마저 반감시킨다. 향후 견실한 출판사에서 가능한 에드워드 W. 사이드를 존경하고 그의 글에서 힘을 얻는 역자에 의한 새 번역서가 나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따라서 이 책에 부여한 별 2개는 원저자나 영어판 원서가 담고 있는 가치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한국어 번역본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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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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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타인의 고통> 역시 Genocide나 Holocaust, 內戰, 인종차별 등, 깊은 관심을 갖고 읽어 온 많은 책들과의 관련 하에서 그야말로 한줄 한줄 고통스럽게 읽은 책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쟁이나 지진, 기아 등의 참혹한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며 '타인의 고통'을 소비해 왔다. 전쟁없고, 굶주림없고, 내 육체의 온전한 보존이 가능한 안락한 곳에 앉아 저 멀리 아프리카의 내전을 담은 끔찍한 이미지의 사진들을 감상하며 방관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실명한 영국 병사들을 찍은 사진이나 저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 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오마하 비치를 찍은 흔들리는 사진 등, 우리의 뇌리에 남아 과거를 반추하게 만드는 이미지들.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91년의 걸프戰은 그때까지의 전쟁을 나와 가까이 있는 실체로써가 아니라 텔레비전을 켜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스펙터클로 만들었다. 전쟁이 게임처럼 진행되고 첨단 무기들끼리 부딪치며 끝나고 나면 깨끗하게 정리되는 사건현장처럼 그렇게 소비된다. 사람들은 서서히 전쟁에 대해 잊게 되고 오직 충격적인 이미지들로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전시되거나 우리의 눈 앞에 다시 제시된다. 즉, 사람들은 저 멀리서 벌어진 전쟁에서 몇 사람이 죽었고, 몇 채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蠻行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오직 텔레비전의 화면과 몇 장의 사진을 통해서만 '보는' 것이다. 전쟁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다음 번 전쟁을 막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면서 이번엔 어떤 이미지로 전쟁을 정리할 것인가가 중요할 따름이다.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들에 노출된 시청자들이 어떤 분쟁을 중요하다고 의식하도록 만들려면, 이제는 그 분쟁을 다룬 단편적인 필름들을 일상적으로 확산시키고 또 확산시켜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p.43) 이렇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이 곳이 아닌 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고통들은 오락거리로 전락하여 오늘자 신문에 실렸다가 내일자 신문에서는 더욱 참혹한 사진들로 신속하게 대치되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나와는 관계없는 열등한 인종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하고 외면하거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체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라며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뿌리 뽑혀 나가고 있다. 즉,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있는 소위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현장들을 담은 사진들이 아무리 화랑에 전시되고 텔레비전에 비추어진다 해도, 내 육체의 훼손이나 정신의 파괴가 아닌 이상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할 뿐,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연대의식을 느끼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그곳에 태어난 것이 죄일뿐, 나는 그곳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가 용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곳에 태어났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면 똑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아니, 육체적 고통 이전에 강제로 목숨이 먼저 끊겼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참혹한 이미지들은 시공을 넘어 인간조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이토록 폭력적인가? 아니, 왜 폭력에 경도되는가? 적을 상정하고 타자화, 또는 비인간화하여 자신의 내면의 광기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통해 전달되는 타인의 고통은, 특히, 죽음의 순간(혹은 바로 그 직전)을 찍은 것일 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마련이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염려없이 그저 타인의 죽음에 '나중에' 입회한다는 시공간적 후발성에 의해 정서적 축소를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저 사람의 죽음에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하자면 사진을 보고 있는 나는 사진 속 희생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그 사진을 더욱 주관적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리감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특히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에 의해 대량으로 학살당한 캄보디아인들의 처형 직전 찍은 사진들(p.97)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성의 폭력적 근원에 대해 도대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하는 절망적인 상념마저 불러 일으킨다. 왜 그들의 사진을 찍은 것일까? 곧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겁에 질린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것이야 말로 공포의 재생산이 아닌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또는 현상된 자신의 얼굴을 결코 볼 수 없었던, 강제로 목숨을 박탈당하기 직전 사람들의 사진은, 그 사진을 찍도록 명령한 권력자의 잔학성 아래 권력이 부여하는 '완전한 지배'에 대한 맹목적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저항할 수없는, 아니, 저항할 의지마저 놓아 버린 同種을 학살하면서 권력자는 극한의 성적쾌락을 경험할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공포에 익숙해지면서 공포를 넘어서는 인식의 무디어짐에 익숙해지고 결국 외부의 충격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된' 적응이다. 아무런 대안도,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그러면 왜 인간은 집단적 교훈을 얻고 나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사진을 통한 기억의 보존이 오히려 동일한 잔악행위를 유발하는 것일까? 혹시 참혹한 대량학살의 이미지가 또 다른 대량학살이 재생산되는 추동력은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재현의 실패가 아닐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진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이미지만을 소비하고 나의 안락함 뒤로 숨는다는 뜻은 아닐까? 그러면 근본적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중략)....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p.154) 즉, 내가 누리고 있는 안전과 신체의 보존은 결국 타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거나 빌려온 것이라는, 이제까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간애 또는 인류애라는 보편적 연대의식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안락과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은 폭력의 결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책읽기였다. 그래도 진실의 문에 한 발 다가선 느낌이다. 평화를 원하는가? 이 책을 읽고 자문자답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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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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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을 읽고 처음 알게 된 뒤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고 나서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던 서경식 선생의 가족사와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양가적 사유체계를 담고 있는 <난민과 국민사이>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책 곳곳에 나오는 저자의 두 형과 부모님이 겪었던 가슴아픈 일들, 일본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수십만 조선인들의 스산했던 삶에 대한 통렬하고 절절한 사연들,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한결같은 차별과 노골적인 무시 내지 외국인 혐오증의 도를 넘은 일본정부의 정책 등, 국가에 귀속되어 세금을 내면서 투표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한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처연함에 수시로 책을 내려 놓고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과거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사과하지도 않으면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과 다른 민족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하며 국가주의로 급속히 기울어 가는 일본, 더욱이 이미 세계 유수의 군비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이 헌법상의 제약마저 벗어 던진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p.9) 헌법 제 9조의 수정조항을 둘러싸고 일본이 벌여온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아시아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시절을 다시 한 번 재현하고 싶어하는 야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대한국관은 과거 대조선관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않았다. 과거 "...센진(조선인에 대한 멸시적 표현)의 썩은 머리를 깍을 기계는 없다며 이발을 거부하고 쫓아 보낸다, 정거장 대합실에서 자리를 양보하라며 구둣발로 찬다, 오늘은 조선이 일본에 패한 날이라며 조선 아이를 욕하는 소학생..."(p.50) 등의 조선인에 대한 일상적 차별은 저자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조센, 조센, 꺼져, 꺼져"(p.55)라는 경험과 겹치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민족적 차별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그만 울컥해진다. 정신대에 대한 대목에서는 일본인들의 후안무치하고, 조선을 식민지배했던 과거의 오만함이랄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편견의 극한에 그만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깊은 인식의 골이 패여 있다. 여기에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광범위한 역사왜곡까지, 일본과 얽힌 악연은 언제나 한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날 수 밖에 없다.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들 대부분은 일제시대 때 강제동원되어 일본의 탄광 등에서 노동하다 죽어간 조선인들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일본이 필요에 의해 (그들 표현대로) 내지에 끌고 와 실컷 부려먹고는 해방 후 모든 권리를 박탈한 채 방기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하지 않고 구미의 마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겠다는 비논리적인 정책을 펴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본에 살지 않았을 사람들이 바로 재일 조선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책임은 일본에게 있는데 도리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윤리적인 태도가 재일조선인들을 절망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이 얽어맨 저자의 가족사 역시 비극 자체다. 고국인 남한으로 유학 온 저자의 두 형들은 간첩으로 몰려 꽤 오랜 시간동안 옥살이를 했고, 저자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인간의 조건에 대해 깊은 성찰에 이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나 대량학살로 인해 조국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디아스포라적 인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모든 폭력과 정치적 희생자에 대한 연민내지 연대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나를 포함한 현대의 한국인들은 재일조선인(이 표현은 저자가 고집하는 표현이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와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해방 후 한국의 정책이 재일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조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아니, 재일조선인들에 삶에 대해 생각이나 제대로 해보았던가? 그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았을지, 얼마나 스산한 삶을 이어왔을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민족 차별에 일본으로 귀화하는 조선인을 단순히 비난하며 도덕적인 단죄를 강요하지는 않았는가? 사실 나도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 까진 재일조선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서경식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차별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한국인의 후손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계속적 투쟁을 하겠다는 결의임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재일조선인 개개인의 삶에 대해 어렴풋하나마 관심이 생긴 것에 불과하다. 처절한 반성을 해야 할 대목이다.  

서경식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출판된 책들을 모두 읽어서 그동안의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글을 마치기 전 몇 가지 질문을 제시해 보겠다. 지금도 외국인등록증 상시 휴대를 의무화하여 재일조선인들을 치안방해의 대상으로 항상 감시하는 일본정부의 비뚤어진 자세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재현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일본관은 과연 어느 선상에 서있는가?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이용해야 하는 경제적 파트너인가? 아니면 북한의 핵위협에 공동대처하며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군사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전략적 파트너인가? 일본인을 믿어야 하는가? 국가로써의 일본과 일본국민은 어떻게 다른가?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일본과의 공생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번씩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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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아래 게시한  Sven Lindqvist의 <야만의 역사>를 읽고 난 뒤, Genocide와 Holocaust에 관한 책들을 찾아 부지런히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접하게 된 책이 바로 같은 저자의 <A History of Bombing, 2000>의 우리말 번역서인 <폭격의 역사,2003>다. 항공기가 발명된 이후 어느 누구에 의해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전쟁에 이용해보자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을테고 실제로 이용해보니 효과가 좋아서 전쟁수행의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이기 시작했을 폭격. 게다가 항공기는 서구에서 먼저 발명된 것이니 만큼 최초의 이용도 결국 서구인에 의한 아프리카인 대량학살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 계속해서 폭격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가 반란이 일어난 식민지를 공격할 때도 일상적으로 활용되었고, 20세기 들어와 벌어진 수많은 전쟁과 내전에서 빼놓을수 없는 합리적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과연 폭격과 대량학살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내가 직접 현장에서 내 손으로 '야수'들을 살해하는 것과 하늘 위에서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폭탄을 퍼붓는 것과의 사이에는 어떤 도덕적 간극이 있을까? 그러니까 폭격을 통한 대량학살을 가능하게 만든 원칙 또는 윤리적 선택이 있는가? 여기에서 대량학살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조그만 양심마저 마비시키는 하나의 이론, 바로 인종주의가 등장한다.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할 권리가 있고, 문명인이 야만인을 문명화시킬 의무가 있다는 극히 편견에 가득찬 담론. 근대국가 성립기 유럽에서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확립하며 제국이 식민지를 개척해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가장 저열한 사이비 과학, 인종주의. 나는 백인종이고 너는 흑인종이니까, 백인은 문명인이고 흑인은 야수이니까, 사람이 야수를 죽이는데 무슨 도덕적 양심이 필요한가? 그것도 저 높은 하늘에서 보이지도 않는 '야수'들을 향해 폭탄을 떨어트려 즉사시켜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서구인의 가공할 오만 앞에 흑인종, 황인종은 그저 인간이 아닌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할 뿐, 벌레들을 대량으로 죽인다고 한들 양심에 거리낄 것은 전혀 없지 않은가? 지독한 타자화, 나와 너를 철저히 구분하여 너를 비인간화 하는 폭력성의 극한,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근대 도구적 기술의 극치, 폭격. 하긴 흑인종, 황인종 뿐아니라 같은 유럽인들끼리도 무던히 죽였지. Battle of Britain이나 독일 본토 폭격이나 결국 폭탄을 떨어트려 적대국의 국민들마저 싹쓸이 하겠다는 단순명쾌한 전술적 귀결이 아니었던가? 저 아래 주거지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떤 문화와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인간이 아닌 야수, 벌레들을 가능한 신속하게 처리하고 내가 속한 인간집단으로 돌아가 나와 내 가족, 내 민족만 인간답게 살면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6분 2초에 초강력 무기의 꿈은 실현되었다. 12,500톤의 TNT의 위력을 가진 최초의 원자폭탄이 아무 경고도 없이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하였다.....(중략).....구조팀이 그날 나중에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을 때, 구조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수만 구의 시체를 모으고 제거하는 데 있었다. 즉사했던 사람들은 폐허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분이나 몇 시간 더 살았던 사람들은 다리 위나 강변에 무더기로 쓰러져 있거나 불기둥으로부터 목숨을 구해보고자 했던 곳인 물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약 10만 명의 사람들(그 중 95,000명이 민간인)이 즉사하였다. 그 대부분이 민간인인 또 다른 10만 명이 방사능 효과로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갔다.(p.240~1)



과연 인종주의적 심성이 사라졌으리라 생각하는가? 곧 무인 폭격기가 등장하여 그나마 폭탄을 떨어트릴 때 일말의 도덕적 양심마저 제거하여 더욱 쾌적하고 스마트한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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