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메 그린다 - 그림 같은 삶, 그림자 같은 그림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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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의 『그리메 그린다-그림 같은 삶, 그림자 같은 그림』을 읽고 나서 떠 오른 의문 하나. 예술가를 예술가답게 만들어 주는 필수 요소가 있을까? 그러니까 무엇이 한 사람을 예술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하도록 몰아대는가? 예를 들어 시대와의 불화, 계급갈등, 신분차별 등이 내면에 잠자고 있던 예술혼을 깨워 그 모든 모순들을 넘어 그림에 매진하도록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적어도 조선의 화가들에게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특히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 최북(崔北, 1712∼1786), 연담 김명국(蓮潭 金明國, 1600∼?),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 이징(李澄, 1581∼?),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 양송거사 김시(養松居士 金禔, 1524∼1593) 등, 조선의 각 시대를 힘겹고도 모질게 살아낸 화가들의 굴곡 많은 생애와 그것을 멀찍이 뛰어넘는 그들의 그림 앞에서 나는 시대와 예술가들의 극적인 화해를 본다. 이들은 천민이어서, 역적의 자식이어서, 서출이어서 라는 이런저런 이유와 이런저런 사건과 결부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그 험난하고 질곡 많았던 시절을 견디며 모진 목숨을 살아야 했던 조선의 천재화가들이었다. 조선역사 5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화(士禍)와 역적몰이로 수많은 선비와 인재들이 죽어야 했던가? 잘나고 지체 높은 양반이 끓어오르는 성욕을 절제하지 못해 첩을 얻어 그 첩에게서 태어난 서출들은 그것이 무슨 죄라고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가? 천민이면 양반보다 어떤 점에서 열등하다는 말인가? 그 신분 계급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 권력의 맛을 먼저 맛 본 소수의 사악한 머릿속에서 나온 근거 없는 낭설이 아니었나? 엄격한 성리학적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똑같은 사람으로 살 수 없었던 이들은 아웃사이더로 주변에 머물며 울분과 저항을 온 몸으로 하면서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들에게 예술은, 그러니까 그림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증명이자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권력자도, 양반도 넘어설 수 있는 일종의 자기방어 체계이면서 동시에 자기 존재의 적극적 발현이었다. 이들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었겠는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아무도 사화를 일으키고 역적몰이를 한 권력 당사자들에 대해서는 이름도 기억하지 않고 역사도 그들을 단죄하고 있는 반면, 이들 위대한 화가들은 이름뿐만 아니라 그 탁월한 작품들까지도 면면히 전해져 내려와 지금도 여전히 혼탁하고 모순 많은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준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금력을 쥐고 있던 양반과 고관대작도 이들이 그린 그림을 소유하기 위해 갖은 수작을 다 부리는 모습에서는 비굴함마저 느끼게 된다. 특히 최북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던 귀인이 그가 그림을 그려주지 않자 위협을 가했을 때 항거의 표시로써 스스로 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는 일화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게다가 최북은 당대의 신분 높은 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남인과 소론계 지식인을 포함해 영의정 남공철, 서평군 이요, 성호 이익, 이광사 등, 조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과의 교류는 최북의 높은 예술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통쾌하다. 이들 위대한 화가들의 예술혼을 이제라도 현대 한국인 모두가 적극 향유하고 존숭하며 오래도록 전승해야 하지 않을까? 예술다운 예술도, 예술가다운 예술가도 더 이상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지금(뛰어난 인재들은 모두 사화나 역적몰이로 3대가 멸족되었으니,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일까?), 이 땅에서 먼저 태어나 예술혼을 불태웠던 천재 화가들을 부디 잊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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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열화당미술문고 213
장소현 지음 / 열화당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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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불꽃 같은 사람 사랑의 조형시인』을 읽었다. 아, 모딜리아니! 중고교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목이 유달리 긴 여인의 초상화를 처음 보고는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슬픔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병약한 육체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요절을 예상해서 였을까, 그가 지녔던 예술에 대한 깊은 열정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가면서도 붓을 꺾지 않았다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본래부터 조각을 하고 싶어 했던 그였기에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브랑쿠시의 영향으로 몰두할 수 있었고, 조각에서 손을 떼고 난 후 그린 대부분의 회화작품이 초상화인 것을 감안할 때 조각으로 다져진 선(線)과 면(面)의 조형적 부드러움은 여타 화가들에게는 없는 모딜리아니만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빚어낸 표정과 색채, 그리고 모델 내면의 빛과 어둠을 포착해내는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분석력이야 말로 모딜리아니 회화의 본질이 아닐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딜리아니의 눈과 지성을 통해 재현된 초상화는 단순히 모델과 닮았다는 사실 묘사를 뛰어 넘어 그 사람의 개성과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화가의 정신 작용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렇게 짧고 굵게 예술혼을 불태운 모딜리아니는 36세에 삶을 마감했다.

     예술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대야 살아 있다는 느낌을 실감하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일까? 살아가면서 감내해야 하는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고뇌는 누구든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 해도, 삶이 이토록 스산해야 하는 당위성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모딜리아니가 살면서 겪었던 그 고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고뇌를 이해할 수 없듯, 사람은 누구나 제 나름의 고뇌를 짊어지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쓸쓸한 존재이니. 무념무상(無念無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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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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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내가 소장하고 싶은 작품들의 가상 컬렉션이자, 내가 보여주고 싶은 작품들의 지상(紙上) 전시회라 할 수 있다.”라는 저자의 말로 요약되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분석적인 12편의 서양회화 해설서다. 그런데 단순히 해설서라 하기에는 그림의 선정이나 분석의 방법이 여타 화가들의 화집에 대한 나열식 해설과는 다르다. 우리는 보통 어떤 그림을 볼 때 화가의 생애나 예술 사조 따위에 대한 역사적 사항들을 참고하거나, 아니면 그냥 직관적으로 느낌이 좋다, 나쁘다 정도로 그림을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주관적인 기분이나 느낌에 따라 그림의 표면만을 훑고 지나치는 것이다. 그러나 풍경화나 초상화, 정물화 등의 장르는 도상학적인 지식이 많지 않아도 그런대로 즐길 수 있는 반면, 종교화나 극히 상징적인 그림들은 화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럴 경우 보통 그림 전문가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권위에 기대어 그가 주장하는 하나의 해석만을 신봉하게 된다. 이럴 때 그림을 보는 사람은 자신이지만 어떤 그림의 의미를 단순히 권위자의 말로 확인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이러한 주관적 그림 보기와 객관적 해석상의 괴리를 메워서 올바른 감상의 길잡이가 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다. 진중권은 그림 하나를 해석하는데 그동안 축적되어 온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가능한 한 많은 해석들을 제시한다. 종교화일 경우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도상학부터 역사학적인 증거나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망라하여 하나의 그림에 대한 절대 권력을 거부한다. 필요하면 유사한 소재를 다룬 그림들도 과거나 현재를 넘나들며 날줄과 씨줄로 연결하여 총체적인 시작에서 독자의 이해를 도와준다. 게다가 그림 한 장에 드러나 있는 세밀한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사상적 변화 따위를 꼼꼼하게 설명하는데, 이 점이 또한 진중권의 미학과 서양회화에 대한 깊은 공부를 드러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어떤 서양회화에 대한 기왕의 권위 있는 전통적 해석에 덧붙여 진중권 만의 독창적인 해석까지 두루 알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그림도 자주 접하면 익숙해진다. 어렵다고 처음부터 포기해 버리면 늘 멀리 있는 대상일 뿐이다. 이 책을 읽었으니, 나도 나만의 해석에 도전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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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된 그림 - 우리를 매혹시키는 관능과 환상의 이야기 ART & ESSAY 1
이연식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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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교코의 『무서운 그림』과는 달리 이 책에는 정말 괴물이 나온다, 아니 인간이 상상해온 온갖 기괴한 존재들이 캔버스 위의 그림으로 생명을 부여받고 자신의 존재를 살아 있는 인간에게 각인시킨다고 해야 할까. 세계의 신화나 종교는 괴물이 마음껏 노니는 공간이자 화가들에게는 무궁무진한 소재의 바다이기도 하다. 동서양의 용, 기독교의 악마(또는 사탄, 루시퍼), 지옥(문), 뱃사람들의 전설이나 구전설화에 등장하는 인어, 동화나 만화영화 또는 영화에 질리지도 않고 나오는 흡렬귀, 늑대인간, 유령, 귀신, 도플갱어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왜 이토록 괴물에 매혹되거나 친숙하게 느끼는 것일까? 이 책은 서양과 동양회화(특히 일본)에서 화가들을 사로 잡았던 괴물 그림을 골라 전후 맥락과 역사적 고찰, 또는 심리적 분석을 곁들여 차분하게 헤설하고 있다. 죽음 자체를 괴물로 여기고 형상화한 그림들이 특히 기억에 선연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이 괴물에 부여해온 온갖 감정들은 아마도 인간 자신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악덕, 욕망, 두려움, 비겁함, 사악함 등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괴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괴물을 형상화하고 이미지를 부여하여 땅 위에서의 위계 질서를 꾀한 지배권력이 악하다는 뜻이다. 하나의 전략으로써 괴물이 상징하는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확대이자 권력에 대한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 용을 퇴치하는 기사의 정신적 우월성,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자 했던 오딧세우스의 욕망의 부질없음,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 올 죽음의 평등성. 괴물은 결국, 인간 내면의 규정할 수 없는 욕망과 거대 자연의 무서움이 결함되어 그 두 가지를 이해하고자 발버둥쳐 온 하나의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괴물은 우리들 주변에서 그 생명을 이어나갈 것이고, 괴물은 물질적으로 소비되면서 끈질지게 인간의 정신에 들러 붙어 악귀처럼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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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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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교코의 『무서운 그림』을 읽기 전,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무서운 그림을 다룬 책이겠거니 지레 짐작했었다. 그러니까 지옥도(地獄圖)나 괴물 또는 귀신 따위의, 일반 회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소재로 그린 그림들을 모은 책일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나니, 직접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림보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는 그림이 오히려 오래 지속되는 무서움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들 중에는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나 페테르 브뢰겔의 「교수대 위의 까치」,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의 초상」,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등, 내가 이미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는 각각의 그림에 대해 이해한다고 여겼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저자의 탁월한 분석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페테르 브뢰겔의 「교수대 위의 까치」가 표면적으로는 농민들이 교수대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일견 한가롭고 즐거운 풍속화이지만, 실은 16세기 스페인 지배하의 네덜란드에서 밀고가 횡행했고 마녀재판이나 이단 심문 등을 통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 왜 이 그림이 무서운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또는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의 초상」이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헨리 8세라는 냉혹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구가했던 한 남자의 정치적 야심과 여섯 번의 결혼에서 노출된 잔혹성 등에 대해 화가가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려야 했던 상황이 진정 무서운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니까 이 책에 수록된 20개의 작품들 중에서 보자마자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림은 많지 않고 오히려 심리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 따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천천히 감상해야 비로소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가지는 절대적 악의나 거부 또는 냉혹함(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혀 불안신경증이나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화가의 내면의 황량함(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 거부당한 사랑에 대한 되풀이되는 잔혹한 복수(산드로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 사회적 출세를 노리는 하층계급의 여성에게 망령처럼 달라붙는 귀족계층의 매춘과 쾌락의 도가니(에드가 드가의 「에투알」), 맹목적인 사랑의 질투로 인한 희생과 반성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사고(오딜롱 르동의 「키클롭스」) 등, 서양회화사에서 명작으로 취급되는 작품들의 숨겨진 무서움을 모르고서는 진정 작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결국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순탄치 못한 생애와 시대적 불화, 정치적 격변이나 사회적 몰이해 따위의 인간과 인간이 얽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무서운 그림을 생산하고 그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 한 발 더 다가 갈 수 있는 동력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무서운 그림이 양산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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