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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ㅣ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평점 :
나카노 교코의 『무서운 그림』을 읽기 전,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무서운 그림을 다룬 책이겠거니 지레 짐작했었다. 그러니까 지옥도(地獄圖)나 괴물 또는 귀신 따위의, 일반 회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소재로 그린 그림들을 모은 책일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나니, 직접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림보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는 그림이 오히려 오래 지속되는 무서움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들 중에는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나 페테르 브뢰겔의 「교수대 위의 까치」,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의 초상」,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등, 내가 이미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는 각각의 그림에 대해 이해한다고 여겼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저자의 탁월한 분석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페테르 브뢰겔의 「교수대 위의 까치」가 표면적으로는 농민들이 교수대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일견 한가롭고 즐거운 풍속화이지만, 실은 16세기 스페인 지배하의 네덜란드에서 밀고가 횡행했고 마녀재판이나 이단 심문 등을 통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 왜 이 그림이 무서운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또는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의 초상」이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헨리 8세라는 냉혹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구가했던 한 남자의 정치적 야심과 여섯 번의 결혼에서 노출된 잔혹성 등에 대해 화가가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려야 했던 상황이 진정 무서운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니까 이 책에 수록된 20개의 작품들 중에서 보자마자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림은 많지 않고 오히려 심리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 따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천천히 감상해야 비로소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가지는 절대적 악의나 거부 또는 냉혹함(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혀 불안신경증이나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화가의 내면의 황량함(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 거부당한 사랑에 대한 되풀이되는 잔혹한 복수(산드로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 사회적 출세를 노리는 하층계급의 여성에게 망령처럼 달라붙는 귀족계층의 매춘과 쾌락의 도가니(에드가 드가의 「에투알」), 맹목적인 사랑의 질투로 인한 희생과 반성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사고(오딜롱 르동의 「키클롭스」) 등, 서양회화사에서 명작으로 취급되는 작품들의 숨겨진 무서움을 모르고서는 진정 작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결국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순탄치 못한 생애와 시대적 불화, 정치적 격변이나 사회적 몰이해 따위의 인간과 인간이 얽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무서운 그림을 생산하고 그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 한 발 더 다가 갈 수 있는 동력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무서운 그림이 양산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