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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황홀한 여행
박종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는 바램은 늘 내게 갈증을 동반하는 물 한모금의 절실함이었지만, 이런저런 핑계와 생활의 반복되는 타성에 떠밀려 언제나 바램으로 그칠 뿐 이었다. 내게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와 예술의 정점이자 지중해의 바닷바람으로 각인된, 지구 위에 있으면서도 지구를 멀리 벗어난 어느 외계의 풍경 같은 그런 느낌으로 까닭모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아마 30대 이후에 집중적으로 읽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나 『르네상스의 여인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신의 대리인』과 같은 일련의 이탈리아 관련 역사서들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때마다 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프리마베라』등의 명화들을 볼 때마다 죽기 전 한 번은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점에서 박종호 선생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15년 동안 20번이 넘게 이탈리아 각지를 방문하고 매력적인 여행기까지 남겼으니 말이다. 『박종호의 황홀한 여행』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안내로 베네치아부터 밀라노, 피렌체를 거쳐 나폴리와 소렌토까지, 이탈리아의 동서남북을 가로 지르는 여행을 끝냈다. 음악과 관련 있는 소소하지만 알찬 정보들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으니 일석삼조! 예를 들어 오페라에서의 뱃노래는 베네치아를 지칭하며 여기서의 배는 곤돌라는 것,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가 베네치아의 숭배자일정도로 베네치아를 사랑했다는 것 등. 여행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인지 박종호 선생은 베네치아 앞 바다인 아드리아 해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달라고 가까운 사람에게 말해 두곤 한다는 은밀한 소망을 비춘다. 그의 소원이 마지막 사치가 아닌 실제로 이루어지길. 이 외에도 베로나에 있는 투비노(Tubino)라는 이름의 가족이 경영하는 작은 카페(베로나와 이탈리아 전역에서 커피 맛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데, 나도 이곳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와 매년 여름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 아레나 디 베로나라는 콜로세움의 탁월한 음향효과를 가능케 한 로마인의 건축기술, 밀라노의 대성당인 두오모(Duomo)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아마 이 건물을 보는 순간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되리라)과 라 스칼라 극장의 진정한 가치, 주세페 베르디를 배출한 작은 마을 부세토, 말이 필요 없는 피렌체(박종호 선생의 말을 빌리면 “여기는 피렌체다. 우리가 지금 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수많은 유럽 문화를 탄생시킨 곳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 중에서 신세를 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p.214)), 분수를 통해 돌아보는 로마의 역사와 유적들, 수많은 칸초네의 고향인 나폴리와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소렌토까지, 이탈리아 곳곳에 산재한 아름다운 풍경과 인간이 만들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건축물들,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리고 조각한 그림들과 조각품들, 지중해의 아주리(Azzurri)색 바다가 눈을 시리게 하는 푸른색의 장엄함,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역사와 예술적 전통이 부여하는 중압감에 눌리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곳곳에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보통 이탈리아 인들의 소박하면서도 때로는 일상을 초월한 듯 예술에 파묻혀 사는 삶의 태도가 내 마음에 큰 파문을 남겼다. 무슨 그럴듯한 명성과 돈에 대한 집착,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타인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탈리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한 곳에 하나도 아닌 수많은 천재들이 동시에 태어나 예술의 각 분야에서 이상적 균형미를 갖춘 지극히 정신적이고도 육체적 욕망에 충실한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인간으로써의 자각과 가능성에 먼저 눈뜬 그 지혜가 아니었을까? 내 나이 쉰이 얼마 안남은 시점에서 언제쯤 이탈리아에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관광지에서 사진이나 찍고 서둘러 떠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