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 - 예술가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린다
이연식 지음 / 이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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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모르게 우울할 때가 있다. 아니, 그 이유를 얼핏 알 수 있다 해도 깊이 가라앉는 심리 자체를 건져 낼 수 없음에 절망하곤 한다. 특별한 해결책은 없다. 그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 외엔. 이 경우 만약 내가 화가라면 그 멜랑콜리와 어떻게 대적할까? 미술사가 이연식의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에 소개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피터르 브뤠헬, 에드가 드가, 오딜롱 르동, 빈센트 반 고흐, 에드워드 호퍼 그리고 앤디 워홀은 멜랑콜리가 일종의 정신작용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하고는 또 주기적인 멜랑콜리에 빠져든다. 그러면 멜랑콜리는 예술 창작의 영감인 것일까? 아니면 가끔씩 나도 지독한 우울증에서 회복하기 힘든 때가 있는 것을 보면 화가뿐 아니라 누구든 멜랑콜리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지 않을까?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은 것이 인간의 삶일지니. 저자는 말한다, ‘멜랑콜리는 삶과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한 감정이다. 세계는 우연과 이미 주어진 요소에 의해 지배되며, 지금 흥하는 것이라도 언젠가는 쇠하고, 퇴색하고, 와해되고, 죽고, 의미를 잃을 것이다.....응답하지 않는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다. 멜랑콜리는 이러한 세상과의 불화, 좌절, 대답 없는 세계 앞에서 느끼는 절망에 기인한 우울함이다. 녹록지 않고 결코 명료하지도 않은 세상을 속속들이 익히면서 생겨나는 감정이다.’(p.16)라고. 곰곰 생각해보면 청년 시절, 나는 수시로 멜랑콜리에 빠져 들어 아득한 감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때가 많았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삶의 방향성에 대한 막연함과 무계획성이 던져주는 어둠? 이름 모를 대상에 대한 그리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저 권태로움? 이유가 무엇이었든 우울함이 찾아들 때마다 나는 산에 오르거나 니체 또는 쇼펜하우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잠깐, 프리드리히 니체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이들이야 말로 절망과 인간 혐오의 대표자들 아닌가? 대학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떤가? 이들이 멜랑콜리를 극복했던가? 니체는 루 살로메에 대한 연정을 거두지 못하고 오랜 시간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죽었고,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그늘에서 오랜 세월을 무명으로 보냈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상과 광기의 경계에서 도박에 빠져 아슬아슬한 삶을 보내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니 이들처럼 예민한 정신과 분석적인 두뇌의 소유자들에게도 세상은 즉각 응답하지 않았구나. 루 살로메는 니체가 아니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응답했고 자존심 강한 쇼펜하우어가 헤겔로 인해 느꼈을 좌절감,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직전 특별 사면되어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형으로 복역하며 겪었던 인간성의 극단에 대한 내면의 방어적 기능이 멜랑콜리가 아니었을까? 그러면 나는? 내가 니체만큼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고 쇼펜하우어처럼 지독한 인간 혐오자도 아니며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정상과 비정상을 극단적으로 오고 가지 않는 이상 멜랑콜리한 감정에 빠질 이유는 없는데, 왜 주기적으로 멜랑콜리가 찾아오는 것일까? 어쩌면 인간으로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멜랑콜리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좌절과 절망을 겪고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황폐화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이가 한 살씩 늘어가면서 내 곁을 떠나간(갈) 사람들과 깨어진(질) 관계들.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의 대면. ‘노력하면 언젠가는 되겠지’ 라는 희망을 짓밟는 타고난 신분과 권력·금력의 철옹성. 그러니까 나의 욕망이 무한히 충족될 수 없고 나의 희망은 언제나 그저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의 재확인이 바로 멜랑콜리의 뿌리가 아닐까? 지금도 수시로 찾아드는 멜랑콜리가 결코 반갑지 만은 않다. 특히 멜랑콜리에 빠져들기 직전의 씁쓸한 감정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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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풍경
마르틴 바른케 지음, 노성두 옮김 / 일빛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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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무려 15년 전인 1999년에 구입하고는 여태까지 읽지 않고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어떤 책을 마침내 읽은 때가 2014년 6월 13일 금요일 이었다. 13일의 금요일! 책 제목은 『정치적 풍경』이고 저자는 독일의 미술사학자인 미하일 바른케이며 번역자는 노성두 그리고 출판사는 <일빛>이고 가격은 7800원이다. 당시 영풍문고에서 1999년 2월 27일 토요일에 구입한 것으로 내 서명과 함께 표기되어 있다. 당시 어떤 생각에서 이 책을 구매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읽겠지 생각하고는 지난 세월이 무려 15년! 그동안 미술에 관한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비로소 다 읽고 나니 진작 읽었더라면 풍경화의 헤석에 큰 도움을 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풍경화에 감추어진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다’는 부제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서양회화 중 특히 풍경화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간단히 말해 자연속 어떤 풍경을 그린 풍경화가 단순히 그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애초부터 정치적 의도를 담고자 권력자의 의지가 개입되어 권력자에 굴복한 풍경이고 그것으로 신민의 존경과 정치적 권력의 영속성을 확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연을 오직 정복과 개조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서양에서 정치적 의미를 노골적으로 담고 군주의 덕과 통치력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역설하는 많은 풍경화 뿐 아니라 건축물, 거상 조각 또는 주화나 메달 등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쏟아져 나오는 후보자들의 자서전이나 전기 역시 똑같은 의도가 개입된 기획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상은 늘 지배와 피지배의 반복이고, 예술가 역시 먹고 살아야 하는 생산 담당 노동자로써 자신의 예술적 정열이나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보다 시류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각설하고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인용해 보자. ‘인간이 자연 속에 설치한 인위적인 구조물들을 통해 풍경은 인간에게 지각되는 동반자 관계에 놓이게 된다. 경계석·도로·기념비를 통해 인간은 자연의 의미를 소유의 의미로 바꾸고, 풍경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증언을 얻고자 한다. 성채는 풍경 속의 지형을 실용적 목적으로 이용한 것이지만, 성채를 건축한 인간들의 심리적인 자세도 드러내 보인다.....정원은 인간의 이성에 맞추어 풍경이 개조된 경우다.....자연 거상을 통해서 우선 군주에게 자연의 힘이 전달되고, 군주는 자연의 혜택을 전달하는 자로서의 우세한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p.216~7) 어떤가? 책에서 전개되는 내용이 압축적으로 이해되지 않는가? 15년의 간격을 두고 참으로 독특한 주제의 책을 읽었고, 세상에 쓸모없는 지식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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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황홀한 여행
박종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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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가고 싶다!는 바램은 늘 내게 갈증을 동반하는 물 한모금의 절실함이었지만, 이런저런 핑계와 생활의 반복되는 타성에 떠밀려 언제나 바램으로 그칠 뿐 이었다. 내게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와 예술의 정점이자 지중해의 바닷바람으로 각인된, 지구 위에 있으면서도 지구를 멀리 벗어난 어느 외계의 풍경 같은 그런 느낌으로 까닭모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아마 30대 이후에 집중적으로 읽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나 『르네상스의 여인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신의 대리인』과 같은 일련의 이탈리아 관련 역사서들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때마다 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프리마베라』등의 명화들을 볼 때마다 죽기 전 한 번은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점에서 박종호 선생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15년 동안 20번이 넘게 이탈리아 각지를 방문하고 매력적인 여행기까지 남겼으니 말이다. 『박종호의 황홀한 여행』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안내로 베네치아부터 밀라노, 피렌체를 거쳐 나폴리와 소렌토까지, 이탈리아의 동서남북을 가로 지르는 여행을 끝냈다. 음악과 관련 있는 소소하지만 알찬 정보들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으니 일석삼조! 예를 들어 오페라에서의 뱃노래는 베네치아를 지칭하며 여기서의 배는 곤돌라는 것, 리하르트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가 베네치아의 숭배자일정도로 베네치아를 사랑했다는 것 등. 여행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인지 박종호 선생은 베네치아 앞 바다인 아드리아 해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달라고 가까운 사람에게 말해 두곤 한다는 은밀한 소망을 비춘다. 그의 소원이 마지막 사치가 아닌 실제로 이루어지길. 이 외에도 베로나에 있는 투비노(Tubino)라는 이름의 가족이 경영하는 작은 카페(베로나와 이탈리아 전역에서 커피 맛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데, 나도 이곳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와 매년 여름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 아레나 디 베로나라는 콜로세움의 탁월한 음향효과를 가능케 한 로마인의 건축기술, 밀라노의 대성당인 두오모(Duomo)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아마 이 건물을 보는 순간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되리라)과 라 스칼라 극장의 진정한 가치, 주세페 베르디를 배출한 작은 마을 부세토, 말이 필요 없는 피렌체(박종호 선생의 말을 빌리면 “여기는 피렌체다. 우리가 지금 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수많은 유럽 문화를 탄생시킨 곳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 중에서 신세를 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p.214)), 분수를 통해 돌아보는 로마의 역사와 유적들, 수많은 칸초네의 고향인 나폴리와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소렌토까지, 이탈리아 곳곳에 산재한 아름다운 풍경과 인간이 만들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건축물들,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리고 조각한 그림들과 조각품들, 지중해의 아주리(Azzurri)색 바다가 눈을 시리게 하는 푸른색의 장엄함,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역사와 예술적 전통이 부여하는 중압감에 눌리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곳곳에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보통 이탈리아 인들의 소박하면서도 때로는 일상을 초월한 듯 예술에 파묻혀 사는 삶의 태도가 내 마음에 큰 파문을 남겼다. 무슨 그럴듯한 명성과 돈에 대한 집착,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타인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탈리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한 곳에 하나도 아닌 수많은 천재들이 동시에 태어나 예술의 각 분야에서 이상적 균형미를 갖춘 지극히 정신적이고도 육체적 욕망에 충실한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인간으로써의 자각과 가능성에 먼저 눈뜬 그 지혜가 아니었을까? 내 나이 쉰이 얼마 안남은 시점에서 언제쯤 이탈리아에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관광지에서 사진이나 찍고 서둘러 떠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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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 사랑하고 살아가는 큰오색딱따구리 가족의 일상사
김성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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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선생의 『나의 생명 수업』을 읽고 나서 바로 읽은 같은 저자의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라는 또 한 권의 책. 자식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많은 정성과 희생, 보살핌으로 점철되어야 하는 지고지순한 행위인지 큰오색딱따구리 한 쌍의 50일에 걸친 육아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인간의 관념으로는 ‘사랑’에 해당할 저들의 새끼에 대한 집념에 가까운 행위를 인간의 그것보다 열등하다고 감히 낮추어 말할 수 있을까? 갖가지 어려움과 위험이 상존하는 숲 속에서 큰오색딱따구리 부부는 본능과 자연의 섭리를 절대 거스르지 않으며 두 마리의 새끼를 독립시켰다. 비록 새끼와 함께 보낼 시간이 길지 않고 독립과 더불어 숲 속에서 마주칠 확률이 낮다 해도, 그 새끼들 또한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우리들 인간은 어떤가? 과연 큰오색딱따구리만큼의 무조건적 애정을 주고 있는가? 혹여 자식을 학대하거나 방치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식에게 경쟁심만을 부추기고 일류지향을 최고라 여기도록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작 필요한 도덕과 윤리, 조화롭고도 폭넓은 시각,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난 정신의 자유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인간은 욕망이 과도한 동물이다. 무한 욕망의 시대에 절제와 배려의 미덕을 자식에게 가르치는 참 지혜가 요구된다. 특히 아버지의 지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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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 교토 오사카 고베편
이케가야 이사오 지음, 박노인 옮김 / 신한미디어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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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한국에도 고서점가(街)가 존재했다. 중학시절(1979~1981) 언제쯤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형과 함께 청계천에 즐비하게 있었던 고서점들을 돌아다니며 참고서를 찾다가 그 중 한 곳에서 민중서림판 한영사전을 시중보다 싼 가격에 샀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당시 내게 고서점은 시중에서 정가 주고 사야 하는 책을 조금 싸게 살 수 있는, 규모는 작고 지저분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실제로도 가게 밖에 위태로울 정도로 높게 쌓여 있는 책들과 가게 주인밖에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책들이 꽂혀 있던 미로 같은 매장 내의 분위기 또한 이 같은 생각을 강화한 요인일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중 2이던 1980년에 교보문고가 문을 열었고, 그 전부터 종각에는 종로서적이,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종로 1가에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가, 그리고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는 양우당서적이 있었다. 특히 중2 겨울방학 때 형과 함께 처음으로 교보문고에 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 큰 매장하며 무엇보다도 어린 눈에 그 많은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서가에 마음을 빼앗겨 그 뒤로는 혼자서 교보문고에 자주 가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청계천의 고서점가는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고, 대학시절에는 청계천보다 오히려 서울역 앞에 포진해 있던 고서점들을 더 자주 갔었다. 이렇게 청계천의 고서점가는 내게 완전히 잊혀졌을까? 아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정치권력과 경제 논리에 밀려 청계천이 재개발되면서 다시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재작년이던가, 청계천을 산책하다가 발길이 자연스럽게 고서점가로 향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조금밖에 남지 않은 고서점들을 한 곳 씩 둘러보며 착잡한 심정에 사로 잡혔더랬다. 재개발로 거리는 깨끗해졌지만, 예전에는 비록 지저분하고 미로같았어도 한 곳 한 곳이 나름 개성적이었는데, 지금은 서점들이 모두 똑같은 이미지에 취급하는 책도 거의 비슷한 그저 그런 책 창고로 바뀌고 말았다. 비록 내가 정기적으로 청계천 고서점가를 순례하지는 못했어도 책과 얽힌 추억의 공간으로 마음속 한 쪽에 자리 잡고는 있었는데. 도시화가 가져온 쾌적함 대신에 몰개성의 극치를 달리는 단순 소비 공간으로 변해버린 청계천 고서점 어디에 책과 문화가 빚어내는 향기가 있단 말인가? 아쉽고도 마음이 아프다.

           나는 일본과 관련 있는 거의 모든 사항들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책과 고서점에 관한 한 부러운 마음에 울컥 할 정도로 냉정하기가 무척 어렵다. 한국인 몇 명이 이 책을 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케가야 이사오가 직접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고 써내려간 『일본고서점 그라피티-교토·오사카·고베편』을 읽고 나서 부러움은 더욱 커졌다. 모두 52곳의 개성적이고 특화된 고서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새가 위에서 보는듯한 시각으로 그린 각 서점의 조감도는 이 책의 백미라 할 정도로 정교해서 서점 내부와 서가의 위치, 특정 책들이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량이 가히 고서점 가이드북으로써 최고가 아닐까 싶다. 책의 물질적 특성을 애호하고 생활 속에서 책읽기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이 일러스트레이션만으로도 그 곳에 있는 책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일러스트레이션 여백에 씌어져 있는 책에 관한 설명들은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것. 아마 손 글씨체를 살려두느라 그랬을 텐데,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 세대가 읽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아무튼 일러스트레이션 외에도 저자가 제시하는 서적애호정도 점검 항목이나 독서론, 서적수집벽, 고서 시장 등에 대한 단상들을 읽고 나니, 한국인이 일본인을 쉽게 극복하고 그들과 대등해지기가 아직도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 지금 한국인의 독서력은 일본인에 비해 어느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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