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즐거운 살인>이라니? 참, 엽기적인 책 제목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영어판의 제목도 <Delightful Murder: A Social History of the Crime Story, 1984>이니까 직역이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Ernest Mandel(1923~1995)의 약력을 살펴보니 트로츠키 주의자 또는 맑스주의 경제학자로 소개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추리소설의 역사를 썼다고?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같지만, 저자의 머리말을 읽어보면 대단히 타당한 논리에 수긍하게 된다. ".....모든 대륙의 수십 개 나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범죄소설을 읽는다.....이런 상품이 충족시켜주는 욕구들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이 욕구들은 어떻게 변해 왔고 부르주아 사회의 일반 구조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나의 접근법은 헤겔과 맑스가 개진했던 전통적인 변증법이다.....맑스주의자가 범죄소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변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유물론은 모든 사회 현상에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어떤 연구라도 본성상 다른 연구보다 가치가 덜한 것은 없다."(p.9~12) 그래서일까, 부제처럼 이 책은 범죄소설(또는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을 사회적 맥락에서 일종의 계급투쟁이나 사회적 서열간의 갈등, 부르즈아의 안락한 거실에 앉아 자신은 살해당할 염려없이 유쾌한 기분으로 소비되는 고급 오락물로 분석한다. 마치 현대의 관객들이 자신은 살해당할 염려없는 어두운 극장에 앉아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이 잔혹한 살인자에게 한 명씩 처절하게 죽어나가는 장면을 보며 환호하듯, 범죄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의 쾌락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경우를 곰곰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시절에 처음 추리소설을 읽게 되었던 계기는 아마도 탐정의 초인적인 추리력에 반해서라기 보다는 어린이 특유의 잔인함으로 살해장면 자체에 재미를 느껴서 였을 것이다.(초등학생 시절 당시 계림문고에서 어린이용으로 재편집된 셜록 홈즈 시리즈와 괴도 뤼팽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 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권 <A Study in Scarlet>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살인 사건과 추리 과정을 다루고 있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이지만, 작가인 Arthur Conan Doyle의 편향적인 시각도 곳곳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 당시의 제국주의 영국을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도를 포함한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물적 자원과 값싼 노동력으로 지탱되던 富가 없었더라면 과연 영국에서 범죄소설이 창안될 수 있었을지, 내가 알기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극히 가난한 국가에서는 범죄소설이 쓰여진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도, 범죄소설은 분명히 사회적 맥락에서 경제와 자본, 또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치적 소외에 따른 불만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 작가들에 의해 쓰여진 장르라는 점에서 단순히 오락거리라 하기에는 꽤 깊은 울림이 들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소위 고전 추리소설에 속하는 것들로, 요즘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에 비해 분명 사회적인 계급성, 그러니까 저자에 따르면 "고전 추리소설의 유명한 주인공들 대부분은 상류계급 출신이라는 것을 지적"(p.58)하고 나서 읽어야 하는 일종의 제약이 있기는 하다. 따라서 "맑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 당연히 이런 추리소설들 대부분은 부르주아의 애호물이지, 실제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자본가들의 애호물은 아닌 것이다."(p.59) 그러므로 고전 추리소설의 대부분에서 살인자들은 당연히 부르주아가 아닌 하류계급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범죄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쩌면 단순히 인간의 어두운 심성과 살인 자체가 주는 엽기성에 대한 병적 호기심의 해소를 통해 자신이 속해있는 시공간에서 자신의 육체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첫 동기가 무엇이든 범죄소설을 읽는 것은 소위 순수문학이 주지 못하는 인간의 극히 어두운 심연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그것에 대한 확인을 통해 자신에게도 내재되어 있을 그 심성과 마주 대할 용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도 또 하나의 정신적 발전 가능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볼프강 벤츠 지음, 윤용선 옮김 / 푸른역사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평소에 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낯설어 보일 때가 있는가? 분명 자신의 얼굴임에도 어딘가 왜곡되어 보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눈이 보는 실재의 像과 마음이 만들어낸 상이 일치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인간은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내가 부여하고 싶은 데로의 상을 만들어 그 상을 고정시키고는 상대방이 그 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고자 하는 경우에 이 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논의를 확대해 보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할 때 조선인의 성격이나 습성을 철저히 파헤쳐 조선의 영구지배를 획책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가능한 부정적이고 건설적이지 못한 것만 모아 끝없이 조선인들에게 주입한 결과 조선인들 스스로도 나태하고 발전 가능성이 없는 저열한 민족으로 격하했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의도대로 식민 통치가 계속 될 수 있었다. 영국이 인도를 200년간이나 식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끊임없이 주입시켰던 인도의 부정적 이미지 덕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문명국(이라 주장하는)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갔던 것이다. 마치 학습 능력이 조금 뒤떨어지는 아이에게 계속해서 "너는 머리가 나쁘니까 공부해봐야 소용없어."라고 끝없이 부정적인 말을 한다면 그나마 있던 관심마저 빼앗아 정말 공부와 담는 쌓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듯, 누구에게나 있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그것이 전부인것처럼 과장하고 부풀리는 행위는 이미 정치적 박해의 일종으로 볼 수밖에 없다. 특히 그 대상이 유대인 같은 민족 단위일 때는 겉잡을 수 없는 폭력을 조장하고 한 민족 전체의 절멸까지 거리낌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유대인야말로 왜곡된이미지로 인해 너무도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온 민족이 아니던가. 고리대금업자, 수전노, 매부리코, 안짱다리 등, 유럽에서 만들어진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은, 결국 이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신의 부정적 욕망과의 상충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겹쳐지며 확고한 위치를 잡아 나가는 것이다. 1차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이 내부의 철저한 반성 보다는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들의 획책 때문이었다고 외부로 화살을 돌렸을 때 이미 유대인 대학살은 독일인들의 마음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오랜 세월동안 쌓여 온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마치 전쟁상황에서 적의 이미지를 가능한 부정적으로 주입하여 적개심을 강화 하듯이, 정설처럼 수용되어 결코 바뀔 수 없는 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섬뜩했던 부분은 소위 지식인이나 예술가들 처럼, 인간의 심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리라 여겨지는 사람들까지도 예외없이 유대인 비하나 박해에 앞장 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 더욱 더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결국 자신 속에 있는 부정적 이미지들을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극단적인 과장을 함으로써 이익을 보고자 하는 인간의 사악한 심성이 제거되지 않는 한 유사한 일들은 계속될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래 "'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p.12)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책 뒤에 내가 적어 놓은 독서후기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도대체 인간은 언제쯤이나 진정한 평등과 평화를 이룰것인가? 그 때가 오기는 할 것인가? 여전히 저개발과 기아, 가난, 종교 및 민족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인간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2008.7.6(日) 완독" 

 

이 책을 읽었던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만과 일본, 일본과 한국간의 영토분쟁이나 어업분쟁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역사 왜곡 역시 도를 넘었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종족 간 내전이 끊이지 않고 러시아나 독일의 인종차별 역시 우려의 단계를 넘어섰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정부와 권력기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희생되는 민간인들의 숫자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유대인이 유럽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추방되기 시작했던 14세기 이후, 크고 작은 전쟁이나 내전으로 인해 계속 발생하고 있는 난민들은 결국 제 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떠돌거나 남은 生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즉, 국가경영의 의무를 게을리하고 오직 권력유지에만 골몰한 탓에 정작 백성들은 굶주림과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 조국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일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씨는 재일조선인 2세다. 그 역시 디아스포라의 숙명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 뿌리 뽑힌 자로 살아 온 한국근현대사의 비극적 구현체인 셈이다. 일본제국주의와 소수 매국노의 밀약으로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조국을 떠나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지로 떠돌며 스산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가. 조국에서도 버림받은 이들이 다른 곳에서 환영을 받았을리가 없지 않은가? 러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역시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국권을 강탈당한 조국의 무능함으로 인해 생겨난 디아스포라들이 아닌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소수 권력자와 그 아래에서 이권을 챙기는데 골몰하고 있는 하수인들만의 이기적 행태가 계속될 때 디아스포라가 생겨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남북의 이산가족 역시 예외가 아니다. 결국 디아스포라는 일차적으로 한 국가의 정치적 무능함과 무관심에서 생겨나고, 근대 제국주의 처럼 타국을 침략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심성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에 대한 평균적 한국인들의 폭압적인 시선이나 과거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자행했던 정치적 박해가 무엇이 다른가? 어쩌면 인간은 나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타인과 그 집단에 대한 태생적 거부감과 멸시, 그로 인한 폭력과 추방 또는 집단학살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렇게 강제로 뿌리 뽑힌 자들의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지경에 이른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서로를 증오하고 그 증오가 정치적 무능함 또는 왜곡된 시선과 결합될 때마다 세계 각지에서는 계속해서 디아스포라들이 생겨날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결국 인간 심성이 만들어낸 편견과 증오의 산물이니까. 언제쯤 참다운 평화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일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달 전쟁 관련서를 집중적으로 읽었는데, 한국전쟁 관련서인 이 책은 훨씬 오래 전에 읽기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어제(2012. 7.8) 다 읽었다. 이 책은 기왕의 한국전쟁 연구서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전쟁과정 자체를 다룬다. 특히 2부 피란, 3부 점령, 그리고 4부 학살은 제목 그대로 한국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하루 하루를 직접 지켜보는 듯한 박진성이 느껴진다. 특히 4부의 경우, 내 눈으로 내가 읽어나가는 장면들이 과연 한국전쟁 중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일까, 하고 의심할 새도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죽어나가는 과정을 묵묵히 전달하는 필자의 건조한 문체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정적 공포를 넘어 정말 내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지는 육체적 훼손의 극한적 고통을 실감할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피로 쓰여진 듯 읽는 내내 가슴을 짓누른다. 다 읽고 난 지금도 전쟁 중 학살당해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의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고 비명 소리가 귀를 찌르는 듯 하다. 피가 흥건한 학교 운동장과 뒷 산의 공터, 굴 속과 광산, 또는 우물 속에 가득 들어찬 유골들, 학살한 시신을 무더기로 파묻고 흔적을 없애려 불까지 질렀던 잔학성, 이것은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이 아니다. 바로 이 곳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동족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前代未聞의 학살에서 죽어간 수없이 많은 원혼들은 말한다, 도대체 이념이, 사상이 무엇이길래 사람의 목숨을 이다지도 간단히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이념과 사상이 사람 목숨보다 소중하단 말인가, 라고. 해방 후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정작 국가의 건설과 백성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기는커녕, 각자의 체제 유지를 위한 소수 권력집단이 저지른 전쟁에 내몰려 재산을 잃고 정든 고향을 떠나온 댓가가 내 목숨의 박탈이란 말인가? 인민군 점령 치하 남한 곳곳에서, 서울 수복 후 북으로 후퇴하던 곳곳에서, 좌익은 우익을, 우익은 좌익을 대량학살하며 이 땅에 너무 많은 피가 흐르게 했다. 그 뿐이 아니다. 일반인 속에 숨어 있으리라 여겨지는 인민군과 좌익을 잡겠다고 남한 이승만 정권 하의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초토화되어 버린 마을이 한 두 곳이 아니고, 정치적 회개의 기회를 주겠다며 전향을 강요한 국민보도연맹원 가입원에 대한 학살 역시 경찰과 군대에 의한 조직적 토벌작전이었다. 백성들의 목숨을 빼앗는 경찰과 군대는 이미 그 본래적 기능을 잃어 버리고 권력의 사적인 처형기구로 타락한 무장집단에 불과하다. 농사나 지으면서 가족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 온 사람들에게 이념이나 사상은 너무도 거대하고 어려운 것이라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된다는 것도 이해못할 일이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하게 장수를 누리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 또한 재빨리 이념과 사상을 이용하여 자신과 가족의 심신보존에 써먹은 사악한 집단에 불과하다. 이젠 알아야 한다. 전쟁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도 결국 권력집단과 그 하수인들이 대대로 누리고자 하는 특권을 강화할 뿐이라는 것을. 따라서 전쟁은 일어나서도 않되지만, 국민 개개인이 어떻게든 전쟁으로 몰고가려 하는 국가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다. 나는 내 목숨과 내 가족의 행복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목숨과 타인의 가족도 소중하다고 믿는 중년 가장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듯한 이념과 사상도 그 뒤에는 과도한 폭력성을 감추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인간은 상황과 조건이 주어지면 숨어 있던 광기가 너무도 쉽게 고개를 쳐든다는 것도, 따라서 인간성을 늘 경계하고 고삐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수시로 조여 주어야 한다는 것도, 인생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권력집단과 그 하수인들의 졸렬한 사고방식에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전쟁을 벌이는 것도 예방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이흥환 엮음 / 삼인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흔히 역사는 해석의 주체와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되거나 재구성될 수 있는 한계를 지닌다. 사료로써의 기록이나 구술자료, 사진, 그리고 증언 등에 이르기까지, 지난 시간을 올바르게 바라 보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주관적 해석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동서 강대국의 냉전이념이 충돌한 국제적 대리전이라는 시각과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해방전쟁이라는 시각, 남침유도설과 북침설 등, 단순히 한반도에서 일어난 내전을 넘어 다각도로 접근이 가능한 양상을 띈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하고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역사적 사건에 대해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자료가 있다면?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제목처럼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주로 북한에서 쓰여지고 보내지지는 못한 채 미군에게 노획된 다양한 편지들을 모아 엮은 1차 사료다. 편지란 무엇일까?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양측이 개인적으로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私的 글쓰기가 아닌가?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편지글들은 그 자체로 개인의 심신 상태를 보여주는 지극히 주관적인 단편들이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한국전쟁이라는 거대 담론의 정치적, 사상적 시각에 가려 간과되어 온 전쟁 직접 당사자들의 목소리라는 점이 오히려 압도적인 속도로 육박해 온다. 편지의 주인공들 중에는 인민군도 있고 고향의 아버지도 있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여동생이 오빠에게, 남동생이 형에게, 어머니가 아들에게, 오빠가 여동생에게 등, 戰時에 쓰여진 편지들 임을 감안하고 읽어 볼 때 조차도 잔잔한 감동과 애잔한 슬픔, 대지에 뿌리 밖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써의 고뇌와 환희 등, 전쟁과 연결된 일상사가 다채롭게 담겨 있다. 이들 하나하나의 사연은 결국 한국전쟁이 거대한 이념과 사상의 충돌이라는 전형적 전쟁 해석을 뛰어 넘어 전쟁의 진행과정과 파국적 결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원동력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건공산주의건 사상 이전 두 개의 정치권력 집단의 욕망과 권력유지의 다툼에 희생되어 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나 전쟁의 부질없음과 그럴듯한 명분에 가려진 생명 경시, 파괴욕구의 발산에 불과한 이념의 덧칠을 벗겨 인간성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이념도 좋고 사상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과 헤어지거나 재산을 잃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쟁 이전에 사람이 먼저 살아야 한다.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특정 이념이 권력강화에 동원되어 어떻게든 통치기구와 통치방식을 합리화하는 행태도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지양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이념이 없었어도 사람들은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