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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평점 :
지난 달 전쟁 관련서를 집중적으로 읽었는데, 한국전쟁 관련서인 이 책은 훨씬 오래 전에 읽기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어제(2012. 7.8) 다 읽었다. 이 책은 기왕의 한국전쟁 연구서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전쟁과정 자체를 다룬다. 특히 2부 피란, 3부 점령, 그리고 4부 학살은 제목 그대로 한국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하루 하루를 직접 지켜보는 듯한 박진성이 느껴진다. 특히 4부의 경우, 내 눈으로 내가 읽어나가는 장면들이 과연 한국전쟁 중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일까, 하고 의심할 새도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죽어나가는 과정을 묵묵히 전달하는 필자의 건조한 문체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정적 공포를 넘어 정말 내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지는 육체적 훼손의 극한적 고통을 실감할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피로 쓰여진 듯 읽는 내내 가슴을 짓누른다. 다 읽고 난 지금도 전쟁 중 학살당해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의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고 비명 소리가 귀를 찌르는 듯 하다. 피가 흥건한 학교 운동장과 뒷 산의 공터, 굴 속과 광산, 또는 우물 속에 가득 들어찬 유골들, 학살한 시신을 무더기로 파묻고 흔적을 없애려 불까지 질렀던 잔학성, 이것은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이 아니다. 바로 이 곳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동족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前代未聞의 학살에서 죽어간 수없이 많은 원혼들은 말한다, 도대체 이념이, 사상이 무엇이길래 사람의 목숨을 이다지도 간단히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이념과 사상이 사람 목숨보다 소중하단 말인가, 라고. 해방 후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정작 국가의 건설과 백성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기는커녕, 각자의 체제 유지를 위한 소수 권력집단이 저지른 전쟁에 내몰려 재산을 잃고 정든 고향을 떠나온 댓가가 내 목숨의 박탈이란 말인가? 인민군 점령 치하 남한 곳곳에서, 서울 수복 후 북으로 후퇴하던 곳곳에서, 좌익은 우익을, 우익은 좌익을 대량학살하며 이 땅에 너무 많은 피가 흐르게 했다. 그 뿐이 아니다. 일반인 속에 숨어 있으리라 여겨지는 인민군과 좌익을 잡겠다고 남한 이승만 정권 하의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초토화되어 버린 마을이 한 두 곳이 아니고, 정치적 회개의 기회를 주겠다며 전향을 강요한 국민보도연맹원 가입원에 대한 학살 역시 경찰과 군대에 의한 조직적 토벌작전이었다. 백성들의 목숨을 빼앗는 경찰과 군대는 이미 그 본래적 기능을 잃어 버리고 권력의 사적인 처형기구로 타락한 무장집단에 불과하다. 농사나 지으면서 가족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 온 사람들에게 이념이나 사상은 너무도 거대하고 어려운 것이라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된다는 것도 이해못할 일이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하게 장수를 누리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 또한 재빨리 이념과 사상을 이용하여 자신과 가족의 심신보존에 써먹은 사악한 집단에 불과하다. 이젠 알아야 한다. 전쟁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도 결국 권력집단과 그 하수인들이 대대로 누리고자 하는 특권을 강화할 뿐이라는 것을. 따라서 전쟁은 일어나서도 않되지만, 국민 개개인이 어떻게든 전쟁으로 몰고가려 하는 국가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다. 나는 내 목숨과 내 가족의 행복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목숨과 타인의 가족도 소중하다고 믿는 중년 가장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듯한 이념과 사상도 그 뒤에는 과도한 폭력성을 감추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인간은 상황과 조건이 주어지면 숨어 있던 광기가 너무도 쉽게 고개를 쳐든다는 것도, 따라서 인간성을 늘 경계하고 고삐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수시로 조여 주어야 한다는 것도, 인생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권력집단과 그 하수인들의 졸렬한 사고방식에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전쟁을 벌이는 것도 예방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