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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양장) ㅣ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평점 :
선연산 근처 사료 공장에서 공장 폐기물을 땅에 불법으로 파묻은 게 들켜 막대한 벌금을 물고 공장 문을 닫았다. 개발 영역에 들지 못해 오랫동안 버려진 그 공장과 땅은 황폐했고 너무나 흉측하게만 보였다.
그 땅을 사서 화원을 짓겠다고 한 여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여자를 보며 정신이 나갔다고 수군거렸다. 폐기물이 묻힌 땅에 화원이라니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그곳은 다시 식물들이 자라날 수 있는 땅이 되었다. 그곳에 여자는 '브로멜리아드'라는 이름의 화원을 열었고, 세계 각국의 희소 식물을 판매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열일곱 살 나인은 어느 날 문득 2년 전 사라진 박원우라는 선배를 찾는 전단지를 보게 된다. 선배의 아버지가 등교를 하는 학생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선생님들에게 잡혔기 때문이었다. 친구 신미래에게 묻자 이제야 알았냐는 듯 핀잔 섞인 말투로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나인은 그 말을 일단 흘려 들었다.
왜냐하면 나인의 손가락 끝에 싹이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식물들의 소리가 들리고, 생전 처음 보는 소년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등 주변에서 뭔가가 변하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그러다 해승택이라는 이름의 그 소년이 그녀를 찾아와 나인과 자신은 그해에 피어난 유일한 아이들이라고 하며, 자신들이 외계에서 온 누브족이라고 말했다. 나인이 '지모'라고 부르는 유지 이모도 누브족이라고 말이다.
나인은 유일한 친구들인 신미래와 강현재에게도 자신이 사실은 외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나인은 자신이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인 줄로만 알았다. 태권도 도장에 열심히 다닐 만큼 건강한 고등학생이라고 말이다. 지모라고 부르는 이모와 단둘이 살고 있긴 하지만, 가정 형편 같은 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고 여겼다. 미래의 엄마는 아빠와 이혼 후에 요한이라는 이름의 요리사와 사귀고 있었고, 현재는 지워졌어야 할 아이지만 태어났다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나인 역시 자신도 친구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새싹이 자라났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들인 미래와 현재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서 그들을 피해 다녀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때가 되니 식물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택이 찾아와 누브족이라는 외계인이라는 둥, 식물에서 피어난 아이라는 둥의 말을 해주자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사실을 말해줄 순서를 빼앗긴 지모는 나인이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평범한 인간처럼 지내길 바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꽃에서 피어나 흙이 잔뜩 묻은 나인이 갓 태어났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인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다. 여태껏 평범하게 살았는데 외계인이라니 말이다. 그것도 식물에서 피어난 아이라니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런 자신의 정체성에 황당해 할 시간도 없이 나인은 2년 전 사라진 선배 박원우의 사건을 알게 된다. 그는 권도현이라는 친구의 연락을 받은 뒤 사라졌는데, 경찰은 그날 박원우를 만났던 권도현, 김민호, 송우준에게 진술을 받고선 단순 가출로 사건을 빠르게 종결시켰다. 딱 봐도 구린 냄새가 났던 이유는 권도현의 아버지가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였고, 엄마는 명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종합 학원의 원장이었으며,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설립자, 큰아버지는 학교를 이어받은 이사장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지역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의 아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인은 박원우의 실종 전단지를 보고, 우연히 그의 아버지를 마주쳐 대화를 하게 된 이후 사건에 대해 파고들었다. 평범한 17살 고등학생이었다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테지만, 나인은 식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외계인이었다. 원하는 걸 듣고자 하는 나인을 승택이 도왔고, 어렵사리 그 사건의 전말을 식물들이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나인은 이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해 박원우를 아버지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려고 했다.
식물의 소리를 듣는 나인과 10대 아이들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조화를 이루어 몰입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얼핏 평범하게 흘렀을 수도 있는 박원우와 권도현의 사건이 나인을 만나게 되면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진실이 밝혀지고, 그가 저지른 방법과는 다르게 폭력적이지 않은 해결로 마무리되어 정말 좋았다.
그러면서 나인의 정체나 능력 같은 건 밝혀지지 않는 점이 정말 다행이었다. 미래와 현재가 나인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으며 여전히 친구 나인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도 좋았고, 지모가 사랑한다고 말하며 다시 피어나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도 너무나 뭉클했다. 좋았던 장면, 감동적이었던 장면이 종종 등장해 눈물이 핑 돌게 만들어 여운을 느끼며 그 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천선란 작가의 책은 <어떤 물질의 사랑>이라는 단편집만 읽었고 이 책이 두 번째인데, 사실 이 책은 영어덜트 소설로 분류되어 있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과는 달리 영어덜트 소설은 가벼울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푹 빠져버렸고, 금세 다 읽었을 만큼 몰입도와 이야기가 너무나 좋았다. 천선란 작가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쏙 들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덜트 소설이라고 얕잡아봤던 걸 반성한다.
더불어 천선란 작가의 다른 책도 꼭 찾아서 다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마음은 가지고 태어나는 건가 봐요.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가끔 생명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나인도 그런 애 같아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이유를 두지 않는. 요즘 그 애는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함께 구하려고. - P293
소나기가 되어 내린 이 빗물은 다시 저렇게 물웅덩이가 되고, 흙에 스며들었다가 내일쯤이면 잎사귀에 맺힌 이슬이 되어 도로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반복해서 돌고 돌며 이 지구를 떠나지 못하겠지. 떠난 사람의 영혼도 그럴까. 정말 영혼의 안식처가 있어, 죽은 사람은 그곳에 머물다 때가 되면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까. 만일 그렇다면 남자의 아들이 꼭 다시 아버지를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지모는 생각했다. - P301
"나는 그냥 네 말이면 무조건 믿기로 했어. 그러니까 지금도 의심 안 해. 아까 네가 땅을 파랗게 만들었던 걸 안 봤어도 네 말을 믿었을 거야." - P311
"나는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워서 이모가 되었고, 언제나 거리를 두고 너와 함께 공간을 나눴어. 나는 여전히 내가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아. 네가 미래와 현재를 사랑하듯, 그리고 그 아이들이 너를 사랑하듯 나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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