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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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연산 근처 사료 공장에서 공장 폐기물을 땅에 불법으로 파묻은 게 들켜 막대한 벌금을 물고 공장 문을 닫았다. 개발 영역에 들지 못해 오랫동안 버려진 그 공장과 땅은 황폐했고 너무나 흉측하게만 보였다.
그 땅을 사서 화원을 짓겠다고 한 여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여자를 보며 정신이 나갔다고 수군거렸다. 폐기물이 묻힌 땅에 화원이라니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그곳은 다시 식물들이 자라날 수 있는 땅이 되었다. 그곳에 여자는 '브로멜리아드'라는 이름의 화원을 열었고, 세계 각국의 희소 식물을 판매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열일곱 살 나인은 어느 날 문득 2년 전 사라진 박원우라는 선배를 찾는 전단지를 보게 된다. 선배의 아버지가 등교를 하는 학생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선생님들에게 잡혔기 때문이었다. 친구 신미래에게 묻자 이제야 알았냐는 듯 핀잔 섞인 말투로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나인은 그 말을 일단 흘려 들었다.
왜냐하면 나인의 손가락 끝에 싹이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식물들의 소리가 들리고, 생전 처음 보는 소년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등 주변에서 뭔가가 변하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그러다 해승택이라는 이름의 그 소년이 그녀를 찾아와 나인과 자신은 그해에 피어난 유일한 아이들이라고 하며, 자신들이 외계에서 온 누브족이라고 말했다. 나인이 '지모'라고 부르는 유지 이모도 누브족이라고 말이다.
나인은 유일한 친구들인 신미래와 강현재에게도 자신이 사실은 외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나인은 자신이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인 줄로만 알았다. 태권도 도장에 열심히 다닐 만큼 건강한 고등학생이라고 말이다. 지모라고 부르는 이모와 단둘이 살고 있긴 하지만, 가정 형편 같은 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고 여겼다. 미래의 엄마는 아빠와 이혼 후에 요한이라는 이름의 요리사와 사귀고 있었고, 현재는 지워졌어야 할 아이지만 태어났다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나인 역시 자신도 친구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새싹이 자라났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들인 미래와 현재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서 그들을 피해 다녀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때가 되니 식물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는 걸 알아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택이 찾아와 누브족이라는 외계인이라는 둥, 식물에서 피어난 아이라는 둥의 말을 해주자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사실을 말해줄 순서를 빼앗긴 지모는 나인이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평범한 인간처럼 지내길 바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꽃에서 피어나 흙이 잔뜩 묻은 나인이 갓 태어났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인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다. 여태껏 평범하게 살았는데 외계인이라니 말이다. 그것도 식물에서 피어난 아이라니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런 자신의 정체성에 황당해 할 시간도 없이 나인은 2년 전 사라진 선배 박원우의 사건을 알게 된다. 그는 권도현이라는 친구의 연락을 받은 뒤 사라졌는데, 경찰은 그날 박원우를 만났던 권도현, 김민호, 송우준에게 진술을 받고선 단순 가출로 사건을 빠르게 종결시켰다. 딱 봐도 구린 냄새가 났던 이유는 권도현의 아버지가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였고, 엄마는 명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종합 학원의 원장이었으며,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설립자, 큰아버지는 학교를 이어받은 이사장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지역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의 아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인은 박원우의 실종 전단지를 보고, 우연히 그의 아버지를 마주쳐 대화를 하게 된 이후 사건에 대해 파고들었다. 평범한 17살 고등학생이었다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테지만, 나인은 식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외계인이었다. 원하는 걸 듣고자 하는 나인을 승택이 도왔고, 어렵사리 그 사건의 전말을 식물들이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나인은 이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해 박원우를 아버지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려고 했다.

식물의 소리를 듣는 나인과 10대 아이들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조화를 이루어 몰입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얼핏 평범하게 흘렀을 수도 있는 박원우와 권도현의 사건이 나인을 만나게 되면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진실이 밝혀지고, 그가 저지른 방법과는 다르게 폭력적이지 않은 해결로 마무리되어 정말 좋았다.
그러면서 나인의 정체나 능력 같은 건 밝혀지지 않는 점이 정말 다행이었다. 미래와 현재가 나인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으며 여전히 친구 나인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도 좋았고, 지모가 사랑한다고 말하며 다시 피어나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도 너무나 뭉클했다. 좋았던 장면, 감동적이었던 장면이 종종 등장해 눈물이 핑 돌게 만들어 여운을 느끼며 그 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천선란 작가의 책은 <어떤 물질의 사랑>이라는 단편집만 읽었고 이 책이 두 번째인데, 사실 이 책은 영어덜트 소설로 분류되어 있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과는 달리 영어덜트 소설은 가벼울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푹 빠져버렸고, 금세 다 읽었을 만큼 몰입도와 이야기가 너무나 좋았다. 천선란 작가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쏙 들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덜트 소설이라고 얕잡아봤던 걸 반성한다.
더불어 천선란 작가의 다른 책도 꼭 찾아서 다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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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은 가지고 태어나는 건가 봐요.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가끔 생명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나인도 그런 애 같아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이유를 두지 않는. 요즘 그 애는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함께 구하려고. - P293

소나기가 되어 내린 이 빗물은 다시 저렇게 물웅덩이가 되고, 흙에 스며들었다가 내일쯤이면 잎사귀에 맺힌 이슬이 되어 도로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반복해서 돌고 돌며 이 지구를 떠나지 못하겠지.
떠난 사람의 영혼도 그럴까. 정말 영혼의 안식처가 있어, 죽은 사람은 그곳에 머물다 때가 되면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까. 만일 그렇다면 남자의 아들이 꼭 다시 아버지를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지모는 생각했다. - P301

"나는 그냥 네 말이면 무조건 믿기로 했어. 그러니까 지금도 의심 안 해. 아까 네가 땅을 파랗게 만들었던 걸 안 봤어도 네 말을 믿었을 거야." - P311

"나는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워서 이모가 되었고, 언제나 거리를 두고 너와 함께 공간을 나눴어. 나는 여전히 내가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아. 네가 미래와 현재를 사랑하듯, 그리고 그 아이들이 너를 사랑하듯 나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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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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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대만.
장제스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예치우성의 할아버지 예준린이 살해당했다. 치우성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포목점에 갔다가 욕조에 죽어 있는 걸 발견한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리가 없다고 여긴 치우성은 단번에 살해됐다는 걸 예감하는데, 마침 가게로 전화가 걸려온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대가 범인임을 확신하지만, 잡을 길이 없었다.
그때부터 치우성의 삶은 할아버지의 죽음과 뗄 수 없게 된다.

명문고에 다니던 치우성이 친한 친구 샤오잔이 제안한 대리 시험을 치르게 된 건 할아버지의 가게 빚으로 인한 어려움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고, 이후 걸려서 퇴학당해 평판이 좋지 않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싸움질을 하는 양아치들과 한판 벌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군대에 억지로 끌려가게 되는 등 그의 삶이 요란하게 펼쳐진다.



작가의 이력이 평범하지 않은 덕분에 소설의 배경 역시 조금은 남달랐던 것 같다. 히가시야마 아키라는 대만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까지 살다가 일본으로 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이름은 일본인이지만 소설의 배경은 대만이었다. 그것도 전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립과 그로 인한 대만으로의 이주를 소재로 한 가족의 막내 예치우성을 중심으로 흘렀다. 거기에 할아버지가 살해된 사건 역시 소설과 뗄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남의 나라 역사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설명하고 있던 덕분에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전쟁 당시 공산당을 죽이고 일본인에게 붙어먹은 중국인이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할 수 있는 할아버지는 대만으로 건너와 가족들을 건실하게 보살폈다. 그러면서 죽은 의형제가 남긴 유일한 아들인 위우원을 양자로 들여 친자식들보다 살뜰하게 대했다. 또한 유일한 손자인 치우성에게는 더없이 좋은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살해된 걸 목격한 손자였으니 살아가는 내내 잊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치우성의 학창 시절, 반항기, 첫 연애까지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이 흐르는 동안 그 사건을 언급하며 살해범을 찾아야 한다고 상기했다.

사실 그렇게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보통의 사람인 치우성이 할아버지를 죽인 자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찰도 찾지 못하는 범인을 10대 소년에서 20대 청년이 된 그가 찾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소설 중간중간 할아버지가 세운 도깨비불 사당이 등장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진실로 이끌긴 했으나 정답을 보여준 건 아니라서 찾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밀은 생각보다 가까운 데에 있었고, 복수의 염원이 인간의 정이라는 것에 다소 굴복했다는 결말이 드러났다. 그래서 좀 놀라웠다. 밝혀진 비밀도 그렇고 이후 펼쳐진 이야기도 그렇고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따뜻한 것에 참 약하기 마련인 것 같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만장일치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는 것과 유명한 일본 작가들의 어마어마한 극찬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대했는데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고 나서 그 정도까지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대감이 너무 컸나 보다.
그래도 물 흐르듯 흘러가던 예치우성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나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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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끝내 마음을 따르거나 아니면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느 쪽으로 가야 좋은지는 죽을 때까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단호하게 마음을 거절하다 보면 우리는 더는 우리가 아니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되어 간다. - P406.407

그것은 면면히 이어진 증오의 연쇄를 가장 아름답게 끝내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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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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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해리 홀레는 이제 더 이상 없다. 경찰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그는 다시 수사관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카트리네 브라트가 신임 반장이 된 강력반의 말단 수사관으로 말이다. 심지어 해리는 트룰스 베른트센과 거의 같은 급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해리가 사회적으로만 이런 불행을 겪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술을 버릇처럼 들이켜고 종종 기억을 잃을 정도가 됐다. 두 달 반 전, 라켈의 집을 나와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둘이 아직은 이혼이 아닌 별거를 선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되돌리기엔 요원해 보였다.

이런 와중에 해리가 경찰이 되고 처음으로 구속시킨 스베인 핀네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지난 뱀파이어 사건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자신을 비롯해 가족들까지 위협하던 핀네로 인해 해리는 그의 행적을 쫓으며 일어나는 사건마다 그에게 혐의를 두지만, 카트리네는 해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카트리네가 자신을 찾았다기에 그녀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라켈의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살던 그 집 거실에서 라켈이 칼에 찔려 사망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난 해리 홀레 시리즈인 <목마름>까지는 괜찮았다. 라켈이 갑자기 코마에 빠져서 해리가 또 불행해지는 건가 했지만, 그녀는 금세 회복되어 다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리는 당연히 뱀파이어 사건의 범인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는 시작부터 불행한 해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라켈과 헤어져 혼자 살던 아파트로 돌아왔고 말단 경찰로 일하고 있었으며, 다시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종종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다시 불행한 해리로 돌아오게 됐는지는 소설 후반부에 밝혀지긴 했지만, 읽는 동안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조금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와중에 스베인 핀네가 출소해 다시금 여자를 강간하고 임신시키며 중절 수술을 받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해리는 핀네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라켈이 살해됐다고 하니 당연히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라켈과 별거를 시작한 뒤에 그녀의 집 근처에 설치한 야생동물 카메라를 찾아보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메모리카드가 사라져 있었다.
유부녀가 집에서 살해됐고 사라진 귀중품이 없으니 첫 번째 용의자로 떠오른 건 당연히 아직까지는 법적인 남편인 해리였다. 라켈이 살해됐을 거라고 추정되는 시각에 해리는 지난 사건 때문에 인수했다가 팔아넘긴 바에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절친인 외위스테인이 택시 운전사를 그만두고 바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거기다 해리는 그날 술에 너무 많이 취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을 정도가 되는 바람에 육아 휴직 중인 비에른 홀름이 그를 집에 데려다주었다고 확인했다.

하지만 해리는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술에 취해 기억을 잃긴 했지만, 라켈의 집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나 피가 묻은 청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술로 인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라켈의 사건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설마 해리가 라켈을 살해했을 거라고는 절대 믿을 수가 없었다. 시리즈가 10편 넘게 이어지는 동안 해리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술에 절어지내며 조금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경찰이긴 했지만, 해리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어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해리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라켈이 집에서 쫓아냈다고 해서 죽일 마음을 먹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술에 취했더라도 말이다. 누군가가 파놓은 함정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가 빨리 범인을 잡아 처단하길 바랐다.

아내가 살해됐기 때문에 해리는 당연히 수사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해리는 살인범을 제 손으로 잡아야만 했다. 그래서 돌아온 카야와 카트리네와 결혼해 아기를 돌보느라 휴직 중인 비에른, 그리고 때때로 원나잇을 하기도 했던 법의학연구소의 알렉산드라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해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여럿 등장했다. 혐의가 가장 짙은 사람은 당연히 스베인 핀네였고, 라켈의 상사이자 전직 특수작전부대 중령 로아르 보르 또한 수상한 부분이 있었다. 거기다 라켈이 없었더라면 해리와 이어졌을지도 모를 카야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 소설 후반에 라켈이 해리를 내쫓은 이유가 밝혀지면서 충격을 줬고, 이후 그동안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이 범인임이 드러났다.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 범인을 찾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해리는 그를 처단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해리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인간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선택을 했다. 그것도 그를 오랫동안 찾아 헤매느라 정신적인 문제를 앓고 있는 이에게 복수의 칼을 쥐여주었다. 소설 후반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여러 번 받았다. 충격의 연속이라 뒤통수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진짜 범인의 선택 또한 뭔가 안타까운 구석이 있었고, 그 선택과 해리가 숨긴 모든 걸 모를 한 여자까지 가엽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인생의 발걸음을 어디로 옮길지 몰라 선택의 기로에 선 해리는 언제나처럼 불쌍한 우리의 주인공이었다.

정말이지 요 네스뵈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데 최고인 작가다. 행복한 해리를 보는 동안 마음이 놓였는데, 다시금 불행에 빠뜨렸다.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가 살해당하고 범인의 정체로 충격을 주면서 말이다. 해리가 어디까지 갈지 정말 불안하다.
다음 해리 홀레 시리즈는 <Killing Moon>이라는 제목인데 2023년에 출판 예정이다. 아마도 노르웨이에서 출판하고 나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는 좀 걸리지 않을까 싶다.



​​​​​​​

이건 수사야. 그는 속으로 말했다. 여긴 수사 현장이야. 난 지금 꿈꾸고 있지만 자면서도 수사할 수 있어. 제대로 해야 하고 계속 해나가야 해. 그러니 깨어나지 않을 거야. 깨지만 않으면 현실이 아니야. - P90

행복한 순간에 이미 다시는 이렇게 행복할 수 없고 지금 가진 것이 사라질 거라는 지독한 진실을 통찰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빼앗기는 고통과 상실의 슬픔을 미리부터 걱정하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그 능력을 저주한다. - P80

"이건 증오예요. 이건 증오와 슬픔이 지독하게 뒤섞인 거예요."
"그 말이 맞아." 해리가 말했다. 그는 입에서 담배를 빼서 담뱃갑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내가 틀렸어. 난 아직 모든 것을 잃지 않았어. 내겐 증오가 남았어." - P188

"우리는 복수를 해. 합리적이야. 그런데 우린 그게 합당한지 따질 것도 없이 그저 기분이 좋다는 것만 알아. 지금 자네 기분이 그렇지 않나, 홀레? 자네는 자네의 고통을 다른 누군가의 고통으로 만드는 거야. 자네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누군가."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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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국내 최초 프로파일러의 연쇄살인 추적기
권일용.고나무 지음 / 알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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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를 통해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이 익숙해져 있다. 범인이 남긴 단서로만 추적을 할 수 없을 때 범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를 쫓고, 수사관들에게는 범인이 어떤 인물일지 윤곽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놀라워서 굉장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프로파일러라는 직분 자체가 생소할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하게 된 사람이 당연히 존재했다. 1989년 경찰에 입문해 형사로 일하며 현장감식요원을 거쳐 2000년부터 프로파일러로 일한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이었다. 현장에서 과학수사에 매료된 그를 1997년 당시 감식계장이었던 윤외출이 불러들였다. 그 후 2000년에 서울지방검찰청 과학수사계에 '범죄수사팀'이 생겨났다.

이들이 현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당시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는 방향과 많이 달랐다고 한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범인을 잡는 게 익숙한 형사들과 다르게 범인이 무의식적으로 남긴 흔적을 통해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생활 반경이나 습관, 외형 같은 것들도 예상하는 프로파일러는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지긴 했다. 프로파일러라는 명칭 자체가 생소했을 시기였으니 알게 모르게 눈총을 받았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범인을 잡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여러 사건을 머릿속에 담아 축적을 해나가던 권일용은 후에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과 같은,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잡는 수사에 참여했다. 어떻게 흔적만 보고 범인의 윤곽을 잡아낼 수 있는 건지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전문가라 그런 것일 테지만, 그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직관도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았다.

여러 범죄자를 잡고서 면담을 한 부분도 책에 나와있었는데, 어떤 범죄자의 태도로 인해 정말이지 기가 찼다. 경기도권에 거주하던 여러 여자들을 납치, 살해해놓고선 반성하는 태도 없이 증거가 있냐는 말을 했다는 게 진짜 욕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났다. 어떻게 이런 인간을 세상에 살려둘 수가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사람 목숨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람이 아닌 쓰레기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어이없다. 공기도 아깝고 세금도 아깝고 그냥 다 아깝다. 사형제는 존속되어야 한다. 제발 쓰레기 처리를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프로파일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잔혹한 범죄 현장이나 잡히지 않는 범죄자를 향해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낄 분노를 가지고 수사를 하는 경찰과는 다르게 프로파일러는 객관을 유지하며 냉정함을 가지고 범죄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사람이라 후유증이 상당할 것 같았다. 한 번에 하나의 사건을 수사하는 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고 몇 번이고 수사 기록을 읽으며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범죄의 연관성까지 연결 짓는 작업이라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 것 같다.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파일러가 되어 몸 바쳐 틀을 잡아준 덕분에 후배들을 양성하고, 그들이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새삼 권일용 님의 업적이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프로파일러로 활동하고 계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이 직업이 생소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만큼 흉악한 범죄가 많이 일어나 뉴스를 보기 두려워지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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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는 낡은 도서카드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매일 번호를 맞춰 종류별로 서랍에 넣는 사서와 같다. 수많은 미제 사건을 케이스링크하는 작업 여러 개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케이스링크 작업은 도중에 답보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프로파일러는 추적이 잠시 멈췄다고 자료를 버리거나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는다. 잠시 서랍을 닫을 뿐이다. 그러다 유사한 범행이 다시 발생하면 서랍을 다시 연다. - P122

터비는 1990년대 말 어떤 연쇄 강간범에 대한 자문 의뢰에 이렇게 답했다. "그가 법정에서 얼마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든, 그가 체포되어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되기 전까지 그는 결코 강간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58

‘앞으로 내가 가야 될 길은 이렇게 아무도 듣지 않으려 할 이야기, 너무나 잔혹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길이구나, 이런 이야기를 내가 끌어안고 살아야 되는 거구나‘ - 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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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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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피아니스트이자 음대 이사장 쓰게 아키라의 대학에는 명품 악기들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정기 연주회의 오케스트라 멤버로 뽑힌 학생들은 이 악기를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피아니스트 쓰게 아키라가 참여하는 연주회이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기 연주회를 위해 오케스트라 멤버 학생들은 악기를 빌리고 반납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던 중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보관실은 경비가 있고 출입 카드를 찍어야만 하며, 보관실 안에는 창문이 없어서 완전한 밀실이다. 그런데 시가 2억 엔 상당의 첼로가 없어진 것이었다. 전날 마지막으로 보관실을 들어가서 첼로를 반납하고 분실 사실을 안 당일 처음 출입한 사람은 쓰게 아키라의 손녀이자 이 대학의 첼로 전공생 쓰게 하쓰네였는데, 그녀가 첼로를 반납할 때 경비원이 곁에 있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바이올린 전공생 기도 아키라는 집에서 지원을 받지 못해 수업료를 밀린 상태다. 청구서를 받은 아키라는 이튿날 학교 학생과를 찾아갔으나 미납금 연장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데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이번에 열릴 정기 연주회는 성적 우수자가 아닌 오디션으로 뽑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정기 연주회의 콘서트마스터로 뽑히면 수업료가 면제되기 때문에 아키라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안녕, 드뷔시>에서 처음 얼굴을 드러낸 미사키 요스케가 이번엔 음대의 임시 강사를 맡았다. 그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장의 악기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리즈의 이전 소설을 통해 미사키 요스케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기에 어떻게 멋지게 추리를 해낼지 시작부터 궁금해졌다.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지만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바이올린 전공 4학년 기도 아키라였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젊었을 적 바이올리니스트였기에 꿈을 대신 이뤄주고 싶어서 전공을 택했다. 물론 아키라 스스로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술을 전공으로 한다는 건 학생 혼자 감당하기 버거운 비용의 문제가 있었고, 졸업 후의 진로 또한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었다. 넉넉한 집안에서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하쓰네와 비교되는 현실이었고, 실력 또한 평범한 수준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갑갑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 정기 연주회에 뽑힌 멤버는 전공을 살려 오케스트라에 입단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 당연히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같은 학년에 바이올린 천재가 있긴 했지만 여러 이유로 아키라가 콘서트마스터가 되어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가의 첼로가 사라지면서 정기 연주회 개최가 불확실해졌다. 나중에는 쓰게 아키라 학장의 위해를 예고하는 글이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또 다른 기로에 선 절박한 4학년들과 학장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학교 측의 입장 차이로 인해 정기 연주회가 열리지 않을 뻔했지만, 다행히 합리적인 설득으로 인해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소설은 정기 연주회 직전에 수면 위로 떠오른 용의자의 정체로 인해 한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다행히 연주회에는 타격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연주회가 끝난 뒤 미사키 요스케의 추리가 이어지면서 진짜 범인의 정체가 밝혀졌다. 범인은 나쁜 의도로 첼로를 훔친 게 아닌 누군가를 위하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 아키라와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글자로 흘렀고,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리하는 과정이 이번에도 역시나 재미있게 펼쳐졌다. 그러면서 예술가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기로에 선 음대 학생들의 현실도 보여줬다. 예술적인 재미와 현실적인 부분을 의미 있게 담아낸 부분이 좋았다.

"미사키 선생님,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만 갖고 살면 안 되는 거예요? 저를 비롯해 다른 멤버들이 바라는 게 그렇게 분에 넘치는 꿈인가요?" - P210

"단 한 명이라도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해. 음악을 연주하는 재능은 신이 보낸 선물이지. 그걸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데 사용하고 싶지 않나?"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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