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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1873년.
124번지 집에는 세서와 딸 덴버, 그리고 세서의 죽은 아기의 혼령이 살고 있다. 덴버의 오빠들인 하워드와 뷰글러는 오래전에 집을 떠났고, 그들이 떠난 후에 할머니 베이비 석스 또한 세상을 등졌다. 세서의 남편이자 덴버의 아빠 핼리는 가너 씨의 농장, 일명 '스위트홈'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는지, 아니면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다.
둘만 살던 이 집에 두 사람이 나타나 함께 지내게 됐다. 한 사람은 세서가 스위트홈에서 함께 일했던 폴 디였다. 18년 만에 만난 세서와 폴 디는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다 어느새 함께 지내게 되었고, 침대 옆자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덴버는 그 사실이 영 마뜩잖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함께 서커스 구경을 다녀오던 길에 깔끔하게 차려입고 새 구두를 신은 흑인 아가씨가 집 앞에 드러누워 있는 걸 발견한다. 목이 말라죽어가는 그녀를 집안에 들인 이후 돌봐주게 되고, 특히 덴버는 그녀 빌러비드를 돌보는 일에 몰두한다.
소설의 도입부만 읽었을 때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고 착각했다. 그것도 그럴 게 집에 혼령이 나타나 가족들을 괴롭히고, 시달림에 견디지 못한 사내아이 두 명은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말이다. 나이가 많아 이제는 삶의 끝자락에 다다른 할머니 베이비 석스는 해를 끼치지 않는 아기 혼령이니 그다지 신경 쓸 게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흑인 여성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베이비 석스가 겪은 인생에 비하면 아기 혼령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세서나 덴버 역시 아기 혼령에 익숙해져 있었던 듯 보였다.
이후 폴 디가 집에 와서 함께 살게 되면서 세서와 관련된 과거가 등장했다. 흑인 노예였던 그들은 가너 씨의 농장에서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가너 씨는 집에서 일하는 흑인들에게 보통의 노동자처럼 대접을 해줬고, 그들을 짐승처럼 때리거나 부리지 않았다. 또한 핼리가 어머니 베이비 석스를 해방해 주는 대신 자신이 일을 더 많이 하겠다는 말에 선뜻 허락해 줬을 정도로 가너 씨는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가너 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은 가너 부인이 농장을 꾸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친척들에게 관리를 맡기면서부터 세서와 핼리, 폴 디와 다른 세 명의 흑인들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칠 계획을 세웠다. 당시에 세서는 이미 세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뱃속에는 덴버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세서는 아이들을 먼저 도망치게 했고 이후 핼리와 함께 떠나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 그녀는 부득이하게 혼자 떠나게 됐다. 핼리의 생사는 세서는 물론이고 폴 디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과거가 등장했을 때 별로 특별할 게 없다고 여겨졌다. 당시엔 절대 흔하지 않았을 자비로운 백인 농장주를 위해 일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도망칠 계획을 짠다는 건 비슷한 소재의 여느 소설과 다를 바 없었다. 베이비 석스가 먼저 자유의 몸이 되어 살게 된 집에서 도망친 세서가, 그것도 도중에 덴버를 낳아 만신창이가 되어 도달했을 때 기적이라고 여겨지긴 했다. 안타깝게도 핼리는 어떻게 됐는지 끝내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핼리의 자식들이 살아서 그 집에 살고 있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노예 사냥꾼이 기어코 베이비 석스와 세서, 덴버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그 집에 찾아왔을 때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단순하게 그 사건만 놓고 보면 지탄받아야 할 대상은 세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면 차마 그녀를 손가락질할 수는 없었다. 도망친 흑인 노예, 그것도 값을 지불하지 않고 더 많은 노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 여성 노예라는 그녀의 처지가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세서의 입장에서는 자식을 자신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세서는 자식을 가축이나 재산이 아닌 한 인간으로 남기고 싶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사건이 빌러비드와 연결되면서 그냥 모든 게 안타깝고 슬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덴버와도 뗄 수 없는 그 상황이 아직 어린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덴버가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했다.
그냥 모든 게 다 비극으로 끝날 것만 같았던 그 집의 이야기는 살아가고자 하는 자와 삶의 빛으로 이끌어준 자로 인해 조금은 희망이 엿보이는 끝을 맺었다. 오해했던 덴버도, 경악하며 떠났었던 폴 디도 세서를 건져올릴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소설은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시절의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마거릿 가너라는 흑인 여성 노예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 다 읽은 후에 해설 부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100년이 훌쩍 넘은 역사지만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이 의미가 있었다.
"대체 이 집에는 어떤 사악한 게 사는 거야?" "사악하지는 않아, 그저 슬플 뿐이지." - P22
그때는 너와 함께 그곳에 누울 수가 없었어.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말이야. 그때는 평화롭게 누울 수 있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어. 지금은 그럴 수 있어. 지금은 익사한 것처럼 깊이 잠들 수 있어. 감사한 일이지. 내 딸, 그애가 내게 돌아왔어, 그애는 내 것이야. - P335
"세서, 내가 당신이랑 덴버랑 여기서 지내면 당신은 마음대로 어디든 갈 수 있어. 원하면 뛰어내려도 돼. 내가 붙잡아줄 테니까. 당신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붙잡아줄게. 필요한 만큼 당신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도 좋아. 내가 당신 발목을 붙잡고 있을 테니까. 확실히 다시 나올 수 있게 해줄게."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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