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미
티에리 종케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인 리샤르 라파르그는 한적한 곳에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늘 바쁜 그는 가정부 리즈와 운전사 로제만 뒀을 뿐이고, 저택 2층에는 바깥에서 문을 3중으로 잠글 수 있는 방 안에 이브라는 여자가 지내고 있다. 방안에 갇힌 이브는 리샤르가 병원에 출근한 뒤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쳤고, 퇴근한 그가 돌아왔을 땐 나체로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보이지만 리샤르는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
때때로 리샤르의 기분이 정말 안 좋은 날에는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 이브를 데리고 가 여자를 사려는 남자들을 불렀는데, 이브가 변태 같은 남자들에서 당하고 있을 때 리샤르는 한쪽만 보이는 거울 너머로 이브의 괴로움을 보며 즐거워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뱅상 모로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에 웬 차가 자신을 쫓아온다는 걸 느낀다. 오토바이의 방향을 급하게 바꾸어도 차는 여전히 뱅상을 쫓아왔기에 그는 안간힘을 써서 도망을 치려고 한다. 오토바이에 내려서 숲으로 도망을 쳤지만 차에서 내린 남자가 계속해서 쫓아왔고, 결국 그는 붙잡혀 기절하고 만다.
뱅상이 눈을 떴을 때 스포트라이트 불빛만 비추는 어두운 지하실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손발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숲에서 자신을 쫓아온 남자, 나중에 뱅상이 '미갈(독거미)'이라고 부르게 된 그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처음엔 그런 상황에 모멸감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미갈에게 애원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미갈은 뱅상에게 물과 음식을 줬고, 나중엔 더 좋은 음식과 와인, 책 등을 가져다준다.

알렉스 바르니는 아는 사람의 농장에 숨어 있다. 은행을 털려고 하다가 경관 한 명을 총으로 쏴 죽이는 바람에 전국에 수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은행에서 턴 돈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이 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신은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그러다 알렉스는 TV 의학 프로그램에서 성형외과 전문의가 나와 얼굴을 감쪽같이 고칠 수 있다는 방송을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소설은 세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됐다. 성적으로 희롱당하는 이브를 지켜보며 희열을 느끼는 성형외과 의사 리샤르, 은행 강도를 저질러 숨어있는 알렉스, 그리고 2인칭으로 '너'라고 지칭하며 다른 폰트로 부각한 뱅상의 이야기였다. 세 사람에 관한 연관성은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짧은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단서로 남겨진 것들을 조합하면 금세 파악할 수 있는 반전에 다다라 놀라움을 안겼다.

단순히 초반에 드러난 상황만 봤을 때에는 이브는 가엽고 안타까운 여자였고, 리샤르는 죽어 마땅한 변태로만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 이면에 숨겨진 비밀은 이브보다 리샤르에게 마음을 더 기울이게 만들었다. 각기 다른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밝혀진 비밀로 인해 리샤르의 행동이 어떻게 보면 조금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의 입장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게 당연할 테니 그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리샤르의 행동에 미약한 저항밖에 할 수 없었던 이브 역시 무력해진 이유가 있었다. 이브의 삶을 리샤르가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브는 모든 것을 온전히 리샤르에게 맡겨야 했다. 비록 그가 시키는 일이 성 도착증을 가진 남자들에게 당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리샤르는 복수를 위해 이브에게 이 끔찍한 일을 저질러 끝나지 않을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브의 고통을 지켜보는 게 괴로웠을지라도 리샤르는 비비안을 생각하면 그 모든 걸 눈에 담고 괴로움에서 기쁨을 느껴야 마땅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리샤르는 이브의 괴로움을 보는 감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괴로움에서 비롯된 희열이 리샤르에게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남긴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리샤르를 향한 이브의 행동 또한 스톡홀름증후군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이 관계를 명확하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복수가 단번에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4년이 넘도록 이어져 왔기 때문에 리샤르와 이브 두 사람의 감정을 바꾸어놓았던 걸로 보였다. 두 사람이 필수불가결한 관계로 보였던 것은 리샤르는 증오하기 위해 이브가 필요했고, 이브는 완전히 바뀌어버린 인생 때문에 리샤르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상대방을 오로지 증오하는 게 아닌 애증이라고 할 수 있을 어떤 감정을 갖게 됐다. 인간의 감정이란 한 가지로만 단정 지을 수 없어 완전하지 않은 듯하다.
어떻게 보면 알렉스의 존재로 인해 리샤르와 이브가 서로에게 진실된 감정을 보이게 된 것인데, 알렉스는 단순 멍청한 범죄자라 그 끝은 당연하게만 보였다. 물론 알렉스만 욕할 게 아니라 리샤르와 이브 모두 정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소설 <독거미>는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내가 사는 피부>로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큰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영화였기 때문이다. 큰 모티브가 너무 강한 스포일러이고, 또 충격적인 내용이라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반전을 알고 소설을 읽게 된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짧은 소설 안에 등장한 두 사람의 복잡한 감정에 몰입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이야기는 흡인력 있었고, 반전 또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와는 다른 엔딩이 의아한 한편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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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신세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나 다름없었어. 거미의 발에 잡혀 결국 먹이가 되겠지만, 거미는 벌레의 약을 올려서 맛을 더 돋우려고 벌레를 그냥 거미줄에 두었던 것이지. 이제 여유가 생기자 거미는 벌레에게 다가온 거야. 너는 거미의 털북숭이 다리를, 커다란 전구 같은 잔인한 눈을, 고기로 불룩해서 출렁출렁하는 부드러운 배를, 독이 든 턱을, 네 생명을 쪽쪽 빨 검은 내장을 상상했지. - P54.55

때로 아파트 사이에 놓인 이중 거울에서 리샤르는 이브의 눈에 고인 눈물을, 괴로움을 이기려고 뒤틀리는 표정을 보았다. 그런 순간이면 리샤르는 이브의 고통을 즐겼다. 그것만이 리샤르에게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다.52

"제발 부탁입니다! 여기로 와보세요! 사람을 잘못 보셨어요! 저는 뱅상 모로입니다! 실수하셨어요! 뱅상 모로예요! 뱅상 모로!"
그러다가 숲에서 본 플래시 불빛이 문득 떠올랐지. 네 얼굴을 비추던 노란 불빛. 그리고 무표정한 남자의 목소리도 떠올랐지.
"그래, 너야."
맞아. 너였어. - P40

리샤르 자신의 소유물인 이브. 리샤르 자신이 그 운명을 창조한 이브. 리샤르 자신이 그 삶을 빚은 이브. 그런 이브가 고통을 당하자 리샤르는 혐오와 동정에 사로잡혔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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