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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추는 찻집 - 휴고와 조각난 영혼들
TJ 클룬 지음, 이은선 옮김 / 든 / 2023년 11월
평점 :
동업자들과 로펌을 설립한 변호사 월리스 프라이스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일한 지 오래된 동료가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관심이 없었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회사에 피해를 입히면 해고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월리스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전처 네이오미와 이혼한 이후로는 가까운 가족도 없었다.
그런 그가 다음 주에 있을 일을 준비하기 위해 일요일에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관상동맥이 막혀 사망했다. 월리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월리스가 상황을 인지하게 된 건 자신의 장례식에서였다. 텅 빈 장례식장에는 전처 네이오미와 동업자 세 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 한 명이 그 자리를 지켰다.
월리스가 옆에서 잔소리를 해대도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던 장례식이 끝나고 난 뒤 그 자리에 있던 낯선 여자가 월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유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에게 그녀, 메이는 사신이라고 하며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며 해야 할 일이 많고 이루고 싶은 일 또한 많은 사람이라면 죽는 걸 억울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더군다나 나이가 젊다면 그 억울함은 배가된다. 소설의 주인공 월리스 프라이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능력 있는 변호사로 맡은 사건 대부분을 승소하는 그는 고작 40살이라는 나이에 급사했다. 그것도 휴일인 일요일에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가 홀로 죽은 것이었다.
쓸쓸하고 억울한 죽음을 미처 헤아릴 새도 없이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그 장례식 역시 한산해서 월리스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깨닫게 했다. 정작 월리스는 조문객 숫자보다 자신의 죽음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의 반응에 더 상처를 받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깝다 여긴 이들의 반응으로 혼란에 빠진 월리스에게 사신 메이가 다가와 그를 데리고 카론의 나루터로 향했다. 메이는 망자를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는 사공을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농담을 한 것이었지만, 이제 막 죽은 월리스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혼란과 당황의 연속인 월리스는 구조적으로 멀쩡해 보이지 않는 4층짜리 찻집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자신을 사공이라고 소개한 노인을 만나게 됐다. 재미있게도 그 노인 넬슨은 알고 보니 사공 휴고의 할아버지이자 망자였는데 저세상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살아가고 있었고, 곁에는 휴고가 키우던 개 아폴로 또한 남아 있었다. 마침내 고대하던 사공 휴고를 마주하게 된 월리스는 따스하고도 편안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삶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월리스는 찻집을 뛰쳐나가 살아 있는 자들의 마을로 넘어가려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하기도 했다. 죽은 게 못마땅해도, 저세상을 위한 경계인 찻집 역시 껄끄러워도 월리스는 그곳에서 지난 삶을 반추하고 또 다른 시작을 마주해야 했다.
죽은 뒤 찻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월리스는 장난스러운 노인 넬슨에게 망자로서 살아가야 할 지혜를 배우기 시작했고, 휴고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보였다. 또한 낮에 운영되는 찻집을 자주 찾는 슬픔에 젖은 여인 낸시와 유령 영상을 촬영하는 자칭 영매 데스데모나도 알게 된다. 그리고 카론의 나루터를 벗어났다가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존재도 만나게 된다.
냉정하고 자기밖에 모르던 월리스는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진정한 인간이 되어갔다. 세상을 떠난 뒤에 인간다움을 가지게 됐다는 게 뭔가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어쨌든 월리스는 그렇게 조금씩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밉상이었던 월리스가 점점 마음에 들어갔고, 나중엔 그가 세상을 떠난 게 안타까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메이와 휴고 둘 다 껄끄러워하는 관리자라는 이를 만나게 되면서 일주일의 유예를 얻게 됐다. 그 사이에 월리스는 마음에 걸렸던 일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이며 진정으로 괜찮은 존재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고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졌다. 세상을 떠난 뒤에 좋은 사람이 되어 가족과 친구가 생긴다는 게 너무 슬펐지만, 결말로 인해 훈훈하고 기분 좋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죽는다는 건 삶의 끝이라 더 이상 긍정적인 그 무엇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 소설이 그런 생각을 바꿔주었다. 죽음은 비극적인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가능성일 수 있다는 게 마음에 와닿았다.
살아 있는 사람과 망자들이 함께 생활하며 다음을 준비하는 찻집 카론의 나루터가 참 따뜻하고 유쾌한 곳이라 좋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죽음은 최종 마침표가 아니야, 월리스. 한 시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침표지." - P183
"이제는 그 모든 게 떨어져 나가고 자네만 남았지. 뒤늦은 깨달음은 강렬하다네. 우리는 우리 눈앞에 놓인 것들의 진가를 알아차리기는커녕 그걸 전혀 보지 못할 때도 있지. 돌이켜보고 나서야 처음에 놓쳤던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 P191.192
어쩌면 그는 의미 있는 사람일지 몰랐다. 거창하게 세상 전반이나 많은 사람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여기 카론의 나루터에서 휴고와 메이와 아폴로와 넬슨에게라면, 어쩌면 그는 의미 있는 사람일지 몰랐다. 월리스가 뜻밖의 상황에서 깨달은 교훈이었다. 무엇이 좋든, 나쁘든, 아름답든, 추하든 사는 동안 최대한 누리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수수께끼의 정답이었고, 가장 중요했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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