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앨마 카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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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애니 헤블리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지만,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는 걸 단언할 수 있다. 타이태닉호에서 승무원으로 일했던 애니는 침몰 사고 이후 극적으로 살아남았는데, 그로 인해 후유증이 생긴 것일 뿐이라 단정했다. 언제든지 스스로 이 병원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녀에게 친구 바이얼릿 제솝의 편지가 도착한다. 바이얼릿 역시 타이태닉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다 살아남았고 애니와는 룸메이트였다. 바이얼릿은 병원선인 브리태닉호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하며 손이 모자라 애니에게 함께 일하자고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바이얼릿의 편지를 받은 애니는 조금 고민을 하다 병원을 나가 브리태닉호에 승선한다.

1912년.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인 애니는 첫 출항을 하는 타이태닉호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일등석 객실 몇 개를 담당하게 된 애니는 고객들의 승선을 돕다가 우는 아기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배에 오른 남자 마크 플레처를 마주한다. 애니는 그에게 단번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마크의 곁에는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 아름다운 아내 캐럴라인이 있었다. 그래서 애니는 마음을 접으려고 하는데 도무지 쉽지 않다.
타이태닉호가 출항을 한 뒤, 일등석 승객들 몇 명이 신문기자인 윌리엄 스테드의 객실에서 열린 교령회에 참석한다. 호들갑을 떠는 부인들이 좋아할 만한 소소한 해프닝이 일어난 뒤, 애스터 부부의 꼬마 하인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일등석 승객들은 이 배에 혼령이 있는 거라 여기며 저마다 다른 공포에 휩싸인다.



소설은 너무나 유명한 타이태닉호와 타이태닉호의 자매선으로 역시나 침몰한 브리태닉호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두 배에 모두 승선했지만 두 번 모두 살아남은 바이얼릿 제솝이라는 실제 인물이 등장했다. 다만 바이얼릿은 주인공인 애니 헤블리의 친구로 등장해 일말의 핍진성을 남겼다.

1916년의 애니는 정신병원에 있다가 바이얼릿의 연락을 받고 브리태닉호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병원선으로 쓰이던 배인데, 애니는 이곳에서 마크와 재회하게 된다. 참전한 마크가 부상을 입고 브리태닉호에 옮겨졌기 때문이다. 초반엔 애니의 시선으로 진행되었기에 마크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애틋함이 느껴졌다.
이후 1912년에 타이태닉호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는 애니가 마크를 처음 마주하고 신경이 쓰이다 사랑에 빠진 과정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배에 유령이 있다는 소문을 곁들였다. 재미있는 놀 거리가 필요한 고귀한 부인들에게 고령회는 그야말로 뜨거운 유행이었다. 그래서 스테드의 객실에 모였을 때까지만 해도 교령회나 유령 같은 건 유흥의 일종이었을 뿐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꼬마 하인이 죽은 이후로 혼령, 유령은 두려워서 피하고 싶지만,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배라는 점으로 인해 맞닥뜨릴 수도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타이태닉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은 모두 개개인의 비극이나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기인된 것이라 여겨졌다. 애니는 고향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도망치듯 타이태닉에 승선했다. 마크는 도박 중독과 사랑했던 릴리언을 잃은 절망감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아내인 캐럴라인 역시 친구로 지낸 릴리언과 관련된 일을 비롯해 약물 중독 문제도 있었다. 매들린 애스터는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부자와 결혼해 임신 중이라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교령회를 주최한 스테드는 과거에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었다. 또한 삼등석 승객인 권투 선수 다이와 레슬리에게도 타인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었다.
이렇게 개개인의 사연과 심리적 불안이 타이태닉호의 분위기를 뒤흔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알고 있는 비극이 다가오면서 그것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그리고 브리태닉호에서 마크와 재회한 애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개개인의 욕망으로 인해 비극으로 이어진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애니와 관련된 부분을 읽고, 브리태닉호까지 이어졌을 땐 소름 끼치게 무서운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했다.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 애니나 마크와 관련된 건 픽션이다. 실화에 오컬트를 결합한 이야기는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라 조금 의아했지만,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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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죽은 이후로, 아니 승선하는 마크를 본 이후로 그녀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신경 거슬리는 불안이 막연하고 서늘한 두려움으로 증폭됐다. 뭔가가 꺼림칙했다. 그녀의 마음 저 밑바닥에서 메아리치는 의구심이, 출처를 전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 배의 도처가 그랬다. 심지어 스테드가 얘기한 그 굶주린 혼령처럼 지금 그녀의 살갗을 타고 미끄러지는 차가운 공기에서도 느껴졌다. - P165.166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은 누구나 선한 욕구와 불손한 욕구를 모두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고 불손한 짓을 탐닉했을 때 따르는 대가는 죄책감일 때가 많다. 그리고 죄책감을 너무 심하게 느끼면 마음의 병이 생긴다. 우리의 분별력이 오염되는 것인데, 오염된 것은 나중에 치료하지 않으면 썩기 마련이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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