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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나'는 열일곱 살 때 에세이 대회 시상식장에서 열여섯 살인 '너'를 처음 만났다. 그곳에서의 만남 이후 나와 너는 가깝게 지내며 종종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너는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말했다. 진짜 자신은 그 벽 안의 도시에 있고, 이곳에 있는 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는 네가 말하는 도시에 대해 궁금해져 이것저것 물어봤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도시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곳에 가서 진짜 너를 만나고 싶었다.
나와 네가 몇 달의 시간 동안 만나며 조심스레 교제를 이어오다가 불현듯 너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매번 보내오던 편지가 더는 오지 않았고, 내가 보내는 편지에도 답장이 없었다. 고민을 하다가 네가 알려준 집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지만, 전화를 받은 나이 든 남자는 너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말에 대꾸도 없이 끊어버렸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땐 결번이라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느 순간, 중년이 된 나는 이곳, 벽 안의 도시에 들어와 있었다. 아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옮겨져 눈을 떴다. 구덩이에 누워있던 나는 벽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발견되어 그림자를 떼어내고, 눈에 상처를 낸 뒤 '꿈을 읽는 이'가 되어 도시 안에 들어왔다. 매일 해가 진 뒤에 나는 도서관에 가서 바깥세계의 너와 똑같이 생긴, 열여섯 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네가 가져다준 꿈을 읽는다. 꿈을 읽는 작업이 다 끝나면 나는 너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준다.
그런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도 나는 문지기에게 맡겨두고 온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는 서서히 생명의 빛을 잃어가다 마침내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로는 계속 마음이 쓰인다. 그러다 나는 그림자와 함께 벽 안의 도시를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소설 초반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나'와 '너'의 십대 시절 풋풋한 교제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 벽 안쪽 도시로 들어온(옮겨진) 중년의 나에 대해 교차로 보여주었다. 십대 시절의 교제는 네가 말해주는 벽 너머의 도시가 주요 화제였다. 마치 둘이서 도시를 만들어가기라도 하듯 네가 도시에 대해 말하면 나는 그걸 습득해 다듬어가는 느낌이었다. 중년이 된 내가 도시 안에 들어와 적응을 해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십대 시절에는 네가 말하던 도시에 가서 진짜 너를 만나고 싶었지만,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갑자기 도시 안으로 옮겨진 상황이라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꿈을 읽는 작업 또한 막연하기만 해서 답답한 감이 있었다. 다행히 열여섯 살의 너와 똑같은 소녀가 사서로 도움을 줬지만, 그 아이는 바깥세계에서의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에 조금은 쓸쓸했다.
같은 사람이지만 나이대가 현저히 다르고, 사는 세계 역시 달라진 두 명의 나를 보여주며 진행된 소설은 1부 마지막이 되었을 때 어느새 하나로 맞물리게 됐다. 두 세계가 어느새 합쳐지는 건 하루키의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설정이라 익숙했다.
그리고 2부가 되었을 땐 앞서 보여준 장면으로 예상했던 진행과는 다른 흐름이 이어져 조금은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1부 마지막에 그림자와 함께 바깥으로 나가려던 내가 마음을 바꿔 그림자만 밖으로 내보내고 끝이 났는데, 2부 초반에서 나는 현실, 그러니까 벽 바깥쪽의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 벽 안쪽 도시에 다녀온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내가 본체인지, 아니면 그림자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벽 안쪽 도시에 있다가 그곳으로 옮겨진 것처럼 어느새 도시 바깥으로 옮겨진 나는 이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성실히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서 연고가 없는 벽지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일하게 된다. 카운터를 맡아 온갖 잡일을 하는 사서 소에다가 있었고, 도서관 관장인 고야스도 일하고 있었는데 나는 고야스의 후임으로 일하게 된 거라는 사실을 채용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곳 일이 익숙해지고 난 뒤에 옐로 서브마린 소년도 알게 됐고, 역 근처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여자도 만난다.
1부에서 2부로 넘어왔을 때 당연히 벽 바깥쪽의 진짜 현실 세계일 거라 단정 지었었다. 현실과 환상, 혹은 꿈이라는 걸로 나누는 게 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고야스가 어떤 존재인지 밝혀지면서 예상을 무너뜨리는 전개에 다시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곳은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경계선이었다. 벽 안쪽 도시로 넘어갈 수 있고, 진짜 현실이라고 부르는 벽 바깥쪽으로도 나갈 수 있는 모호한 경계였다. 그렇게 이어지던 소설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비범했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으로 인해 다시 한번, 그러면서 공고하게 진실을 일깨웠다. 그리고 3부가 되었을 때 현실과 비현실이 섞여든 세계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않았지만, 그 모호함을 받아들이도록 이해시키는 과정이 이어졌다.
익숙하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운 하루키 문학의 재현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첫사랑을 향한 러브스토리라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평행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나의 자아 분열, 혹은 주인공인 '나'가 바라는 이상향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소설이었다.
읽는 동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끝낸 뒤 찾아보니 작가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흡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읽은 지 10년이 더 된 책이라 가물가물했는데, 그마저도 내가 쓴 리뷰를 읽고서야 비슷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하루키의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몇 년 만에 출간된 하루키의 신작 소설은 역시나 읽는 동안 작가가 만든 세계에 푹 빠져들게 했다. 오랜만이라 낯설었으나 어느새 익숙함이 들기 시작하면서 반가워졌고, 이내 주인공 나와 동화되어 그 도시와 현실과 경계를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책 제목에 들어간 형용사처럼 불확실한 모호함이 너무나 좋았던 소설이다.
"당신은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그녀의 그림자고, 이 도시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쎄올시다.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확신합니까, 이 도시에 있는 그녀가 진짜라고?" - P152
어느 포인트에서 나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이쪽 선택지를 고른 나다. 그리고 또 한편, 저쪽 선택지를 고른 내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아마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 P226
내가 가까스로 알 수 있는 건 지금 나 자신의 위치가 아마도 ‘저쪽‘과 ‘이쪽‘ 세계의 경계선 근처이리라는 것 정도였다. 이 반지하 방과 마찬가지다. 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도 아니다. 흘러드는 빛은 엷고 흐릿하다. 나는 그렇듯 어슴푸레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장소에.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한다. 내가 정말 어느 쪽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어느 쪽에 있는지를. - P495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이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 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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